<본문속으로>
이 수행의 핵심은 깨달음이 아주 멀리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본성임을 아는 것입니다. 불에는 열기가 있듯, 우리에게는 깨달음이라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오로지 지금 일어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우리는 깨칠 수 있습니다. 소중한 인간 존재를 사유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150쪽)
명상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아직 살아있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 이제부터 선행을 많이 닦아야겠다” 하고 생각하세요. 수행은 이렇게 기쁨을 일으킵니다. 죽음 명상은 자만심을 다스리는 데도 효과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육질의 몸, 상장과 학위, 빨강색 스포츠카 또는 아름다운 집을 가진 것으로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침대에 누워 임종을 기다리고 있는 자신을 한 번 상상해보세요. 여러분의 지위를 나타낸다고 여겼던 그것들이 지금은 어떻게 느껴집니까?(169쪽)
모든 현상은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일단 받아들이면, 얻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마음이 줄어듭니다. 욕망과 망상의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펄럭이는 마음을 길들이는 것입니다. 무상에 대한 사유와 명상을 결합하면 마음이 평온하고 안정되어 사소한 일이 일어날 때마다 밀어내거나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면 불안이나 불만족에 빠지지 않은 채 자신을 포함한 일제중생을 위해 영속하는 지혜와 자비를 일으키는 데 전념할 수 있습니다. 세간에서 맛보는 당장의 즐거움에서 등을 돌려 기나긴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는 것입니다.(176쪽)
업은 운명도, 또 숙명도 아닙니다. 흔히들 “내 업 때문이야” 하고 결론을 짓곤 하는데,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상황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100퍼센트 오해입니다. 우리는 어떤 성향과 충동, 취향 그리고 성격을 타고 납니다. 그건 명백합니다. 그렇지만 공격적 충동이 꼭 살인으로 이어지란 법은 없습니다. 친절한 본능이 반드시 한량없는 자비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본능이 성숙되려면, 씨앗의 예에서 보았듯, 상황과 조건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행동을 통제하고 감독함으로써 우리가 가진 능력과 타고난 자질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193쪽)
불교와 과학은 모든 현상이 영속하지 않고 변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불법은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 실상을 모두 밝히려면 우리의 습관을 깨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과학의 목표는 진리를 알아내는 것입니다. 불교 또한 마찬가지이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실상의 진리는 그것 자체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체만물의 실상을 알려고 노력합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포함한 만물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똑같지 않음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해탈로 가는 문을 여는 것입니다. 모든 불교 전통은 이 목표를 성취할 수 있는 수행 체계를 마련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수행의 체험을 통해 궁극적 실재를 이해해야만 괴로움을 뿌리째 뽑을 수 있습니다.(237쪽)
귀의수행에서 구루는 수행자의 개인적 스승 또는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또한 귀의수행을 할 수 있도록 구전을 주신 스승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제자는 여기 앉아 있고 스승은 저 앞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제자가 스승을 ‘남’으로 이해하는 관습적 의미의 ‘외적’ 스승은 매우 중요합니다. 외적 스승이 없다면 불법의 가르침을 결코 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다 심오한 의미에서 볼 때 외적 구루는 우리를 내적 구루, 즉 우리 마음에 본래 내재된 지혜와 이어줍니다. 이 마음이 궁극적 귀위처입니다. 이 마음은 평화, 평정, 통찰과 지혜, 자비, 공감 등 평소 우리에게 없다고 생각되는 모든 훌륭한 특성들의 원천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이미 우리에게 있습니다. 외적 구루는 마치 열쇠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그 문을 열어야만 우리 자신, 즉 우리의 진정한 구루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276쪽)
달라이 라마 존자님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중국과의 문제는 끝이 없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인도와 세계 도처에 있는 티베트 자치구에 대한 책임 또한 무한합니다. 세계의 지도자로서, 또한 평화의 수호자, 정신적 지도자 그리고 법맥의 수장으로서 존자님이 지셔야 하는 책임 역시 무한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존자님이 행복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요? 존자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행복한 것은 자비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비심은 제게 에너지를 주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끊임없이 활동할 수 있게 해줍니다. 저의 역량을 키워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