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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북,불교용품,불교서적,불교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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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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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상품명 소설 경
정가 22,000원
판매가 품절
저자/출판사 김정빈/문학의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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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수 760
발행일 2012-05-23
상품간략설명 <제9회 불교출판문화상 수상작><2012 올해의 불서>
인간 붓다의 재세시를 시대적 배경으로 인연관계에 놓여 있는 천상계와 인간계의 이야기를 통해 자기구원의 근원이 불교적 지혜에 있음을 일깨워준다. 지혜야말로 가장 강하고, 가장 높고, 가장 빛나는 힘이라는 것을, 경전문학의 새로운 형식을 통해 보여준다.
ISBN 9788943103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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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456개의 개의 각주(脚註)와 상세하고도 방대한, 136페이지에 이르는 후주(後註)는 이 책이 단순히 한 번 보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읽을, ‘사서삼경’이나 ‘채근담’처럼 곁에 두고 읽어내려 갈 책임을 잘 보여줄 것이다. 한 권에 담기엔 방대한 이야기와 심오한 의미들을 이처럼 쉽고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장려하게 전개한 책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즉, 이 책은 한편으로는 대단한 문학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서이다.


저자소개

김정빈
1980년에 《현대문학》, 1981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하였다. 1984년 11월에 낸 소설 《단(丹)》이 다음해에 최대의 베스트셀러를 기록하였지만 그는 곧 종교(불교)에 투신하였다. 2010년, 그는 25년간의 ‘구도기(求道期)’를 통해 배우고 얻은 바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소년 시절 외경(畏敬)의 마음으로 읽었던 단테의 걸작 《신곡》을 떠올렸다. 더불어 그가 고려한 작품은 괴테의 《파우스트》와 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었다. 그러나 그가 도달한 삶의 길에 대한 결론은 그들 작품들이 제시하는 것과 한편으로는 같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달랐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사상에 걸맞은 표현 방식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2010년 12월 31부터 시작된 그의 글쓰기는 이후 16개월여 동안 이어져 2012년 4월, 본 작품 《소설경》으로 완성되었다.


목차

제1부
진실을 향하여 ㆍ신법경信法經

프롤로그
천인 라자
천녀 시리마
그때 덧없는 이 몸은
하늘 법회

제2부
네 진리 ㆍ견법경見法經

밖으로의 길, 안으로의 길
비구 밧디야
아들은 아버지를 버리고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깨달음
차례

제3부
지혜는 금강처럼 ㆍ논법경論法經

빛의 향연
천신 후루와
합리 초월의 진리
화합승和合僧
미움을 넘어, 사랑도 넘어

제4부
대교향악 ㆍ화법경和法經

몰아沒我, 또는 망아忘我
모든 것은 무아無我로 통한다
기쁜 슬픔
인연
넝쿨과 꽃
그 항구 도시의 전설
인간의 길
아라한의 길, 보살의 길
그대는 장차 부처가 되리라
에필로그

제5부
후주後註ㆍ해법경解法經

개별자와 그 초월
고락중도苦樂中道
돌파와 수용
마음은 빈 컵
법法
법의 탑法塔 1
법의 탑法塔 2
보살菩薩
불교사의 전개와 오늘의 불제자
불교의 승단 제도
불교 명상법
사성제四聖諦
산냐sa??a
삼계三界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
시소의 비유
시인詩人 붓다
신교神敎와 법교法敎
오취온五取蘊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독교와 불교의 관점
1.0의 마음, 2.0의 마음
종교를 믿는다는 것
지금 여기를 가르치는 명언들

각주脚註 찾아보기

작가의 말
책속으로 위로


출판사 리뷰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5개국 영어 출판 결정!!

순결했던 어린 날의 추억을 되돌아보듯
삶의 근본을 재우쳐 되묻는 구도(求道) 소설!
웅대한 구상! 장려(壯麗)한 서사(敍事)!

영국의 다국적 출판사 놀리지 펜(Knowledge Pen)은
왜 세계 문학계에 《소설경(小說經)》을 선택하였나?

지난 달,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의 번역 출판 결정에 이어
영국의 다국적 출판사 놀리지펜은 두 번째 작품으로
김정빈 작가의 《소설경》을 선택하였다.

그 결정의 배경으로서 놀리지펜 출판사는

(1) 현재 유럽에서 불교 인구가 급격히 늘어가고 있는데(불교 신자의 수를 영국은 2백만 명, 미국은 2천만 명으로 추산), 《소설경》을 읽으면 불교의 모든 교리를 알게 된다는 점,

(2) 김정빈 작가가 초대형 베스트셀러를 낸 경험이 있다는 점,

(3) 문장이 스마트하고 클리어하다는 점(문장을 쓰는 작가의 정신이 정직하고 성실하며, 긍정명랑(肯定明朗)하다는 점),

(4) 소설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영화처럼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른다는 점,

(5) 서사의 구성이 대단히 유기적으로 짜여져 있고, 풍부한 비유가 사용되고 있으며, 시(詩, 偈頌)가 다수 포함되는 등 문학적인 표현이 풍부하다는 점,

(6) 작품의 배경이 단테와 괴테 이래로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현대 문학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웅대(雄大)하다는 점,

(7) 도리천(?利天, 불교의 하늘 중 하나)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든지 주인공들이 윤회 전생(輪廻轉生)을 반복하는 등
지금까지 세계 문학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요소가 많다는 점,

(8) 그동안 해외에 소개된 한국의 문학 작품에서는 보기 어려운 풍부한 철학성이 매우 깊고 풍부하다는 점(각주가 456 개, 후주가 136 페이지나 붙으며, 본문에서도 많은 교리 토론이 이루어지는 점. 이 점은 한국에서는 약점일지 모르나 서구에서는 장점임),

(9) 본문에서 제시되는 가르침이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현대인이 삶에 곧바로 적용할 수 있다는 점(현대 서구에 소개되고 있는 불교 중에는 현실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즉 신비주의적(주술적) 불교도 있는데, 본 작품은 그와 반대라는 점),

(10) 본문에 전개된 사상이 불교를 기본으로 하는 가운데 공자(유가) 예수(기독교), 기타 서구 철학의 많은 사상을 수용하고 있다는 점(서구인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개인주의적인 바탕’을 작가 특유의 ‘개별자론(個別者論)’을 통해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

(11) 본문의 사상이 국가성 민족성에 제한받지 않는, 인간 구원(‘인간 구원’은 기독교적인 의미가 있으므로 불교적으로는 ‘자기 구원(구제)’)이라는, 삶의 가장 고차원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단테 괴테 도스토예프스키 이래로 일백 명이 넘는 노벨상 수상 작가들도 다루지 않은 것을 과감히 다룬 점)

등을 꼽고 있다.

따라서, 놀리지펜 출판사는 이 작품이 충분히 세계성이 있고, 또한 1 년이나 10년, 20년 정도만 읽히는 책이 아니라 백 년, 이백 년을 두고 읽히는 고전이 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영화화를 비롯한 장기적인 여러 가지 플랜을 전제로 본 작품의 출간을 결정하였다고 말한다.

죽음은 무엇인가.
그리하여, 삶은 무엇인가.

나는 왜 지금 여기에 있는가.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철학으로서의 《소설경》은 개념적 진실로 답한다.
문학으로서의 《소설경》은 시적(詩的) 진실로 답한다.

《신곡(神曲)》은 우주적 구상으로서 중세적 압권이었다. 《파우스트)》는 방황 또한 향상의 과정임을 근대적 언어로 다채롭게 형상화하였다. 《카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은 인간에게 신은 무엇인지를 19세기 러시아를 배경으로 치열하게 탐구하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독교의 영향 하에 쓰여진 지난 시대 서양의 걸작들이었다. 그리하여 동양 문명의 정수(精髓)인 불교를 기초로 한 지금 이 시대 자기 구원(自己救援)의 문학이 요청되었다.

《소설 경》은 그 요청에 대한 응답으로서 천상계와 인간계를 배경으로 삶과 초월, 운명과 자유의지, 선과 악, 고통과 행복, 사랑과 진실, 꿈과 이상(理想)이 시(詩)가 되고 산문이 되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장려화미(壯麗華美)한 꽃으로 흩날리는 대서사(大敍事) 교향악이다.

출판사 서평

‘단(丹)’의 작가 김정빈이 27년 간의 구도 끝에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3대 대장경을 아우르는 장편소설 ‘소설경’을 완성하였다.

본 작품의 얼개는 도리천에 난 천인 부부인 라자와 시리마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두 사람은 하늘 구도자로서 인간계에 내려와 붓다의 특별 제자가 되어 붓다의 지시에 따라 본 작품의 주요한 주인공 중 한 사람인, 출가하기 전 사?야 국의 왕(붓다가 출가함으로써 비게 된 태자 자리를 이어받아 왕이 된 사람)이었던 밧디야를 만나고, 밧디야는 자신의 스승인 붓다의 수제자 사리뿟따 마하테라에게로 간다.

그 사이, 붓다는 전에 천재적인 음유 시인(吟遊詩人)이었다가 밧디야가 왕이었던 시절 그의 왕비 아유타를 유혹하여 간음한 적이 있는, 그에 더해 절대신 후루와 신앙에 빠져 종교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수만 명을 죽게한 사람인 빙기사를 만나기 위해 인도 반도 서북부 지역에서 출발하여 남서부 지역에 있는 숩바라까 항구 도시로 출발한다. 이에 사리뿟따 마하테라 또한 밧디야 등과 함께 붓다와 합류하기 위해 숩바라까로 떠나는데, 그 사이에 수억명의 천왕 천인들이 사리뿟따와 동행하여 붓다를 향해 나아간다.

그리하여 마침내 여섯 달 뒤에 붓다와 사리뿟따, 숩바라까 시민들, 그리고 삼천대천세계에서 모여든 무량대수(無量大數)의 천왕 천인들 앞에서 빙기사는 붓다로부터 “그대는 장차 부처가 되리라!”는 기(記)를 받는다(受記). 간단히 요약하여 그렇다는 것이고, 그 사이에 수많은 서사가 종횡으로 펼쳐지고, 또한 수많은 불교 교설이 다채롭게 전개된다. 특히, 작품의 실제상의 주인공인 빙기사, 아유타, 밧디야의 인연이 전생으로부터 현생으로 전개되는 후반부에 이르면 서사는 매우 극적이면서도 감동적이다. 작품의 문장은 불교 초기 경전의 그것처럼 소박하고 단순하면서도 명료하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고, 구성은 오케스트라의 각 악장들처럼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인 흐름을 이루며 마침내 서사적 대교향곡이 완성된다.

필자 스스로 말하고 있듯, 단테의 ‘신곡’과 괴테의 ‘파우스트’, 도스트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기독교의 영향 하에 놓인 서양 문학들이라면 동양 문학의 정수인 불교를 기초로 한 자기 구원의 문학에 대한 요청으로 ‘소설경’은 쓰여졌다. 삶과 자유 의지, 고통과 행복, 사랑과 진실, 꿈과 이상이 시가 되고 산문이 되어 삼천대천세계에 장려하게 흩날리는 대서사 교향악으로서이 대작이 탄생한 것이다.

이 소설은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을 계약한 영국의 다국적 출판사 놀리지 펜이, 수십 편의 국내 작품을 검토한 끝에 최종 선택한 작품으로, 번역이 끝나는 대로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러시아, 일본 등 7개 국에서는 직접 출간되고, 여타 영어권 국가에는 수출을 통해 보급될 예정이다.

그에 앞서 '소설경'은 '문학의 문학' 편집부가 자신 있게 추천하는, 2012년의 초대형 작품이다. 문학이 아직도 우리를 설레게 하고 마음을 움직인다면 바로 이런 작품을 통해서일 것이다.

불교를 알고 싶은, 기초 이해는 있으나 불교에 대해 더 확고한 지식을 쌓고 싶은, 불교를 통해 세계의 실체를 알고 싶은, 불교를 통해 삶의 의미와 방향을 찾고 싶은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그리고 불교와 상관없이 각자의 인생의 의미를 찾는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유효하다. 독자는 이 책이 불교 문학이라는 사실은 잊을 것이다. 이 작품은 불교 문학이 아닌 문학, 그 자체의 힘으로 독자의 가슴을 파고 들 것이다.

456개의 개의 각주(脚註)와
상세하고도 방대한, 136페이지에 이르는 후주(後註)는
이 책이 단순히 한 번 보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읽을, ‘사서삼경’이나 ‘채근담’처럼 곁에 두고 읽어내려 갈 책임을 잘 보여줄 것이다.
한 권에 담기엔 방대한 이야기와 심오한 의미들을 이처럼 쉽고 드라마틱하게, 그리고 장려하게 전개한 책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즉, 이 책은 한편으로는 대단한 문학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학서이다.

작가로부터의 일러두기

1. 불교 경전군經典群― 즉, 대장경大藏經에는 스리랑카ㆍ 태국ㆍ 미얀마 등 남방불교권에 전승되어 오는 빨리 대장경P??li-大藏經과 중국ㆍ 한국ㆍ 일본 등 북방불교권에 전승되어 오는 한역 대장경漢譯大藏經(팔만대장경), 티베트에 전해져 오는 티베트 대장경Tibet-大藏經이 있다. 이중 빨리 대장경이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전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바, 본 작품은 빨리 대장경에 보이는 기사記事를 바탕으로 작가가 상상력을 더해 창작한 소설이다.

2. 상기 세 대장경의 사상 및 성격을 비교하면, 빨리 대장경은 간명하고, 소
박하고, 이지적理智的인 요소가 많은 데 비해 한역 대장경과 티베트 대장
경은 방만하고, 화려하고, 감성적感性的인 요소가 많다. 본 작품은 사상
면에서 대체로 빨리 대장경에 근거하되,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에 한
하여 한역 대장경의 사상을 원용하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전반부의 내
용은 빨리 대장경의 사상과 대부분 일치하고, 후반부의 내용에는 빨리
대장경과 한역 대장경의 사상이 혼합되어 반영되어 있다.

3. 본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붓다가 활동하던 BC. 4~5세기경이다. 그렇지만
본 작품에는 그같은 시대적 배경에 구애?지 않고 붓다 이후에 나타난
불교 밖의 여러 사상을 자유로이 원용한 부분이 많다. 특히, 예수ㆍ 공자ㆍ
소크라테스 등 인류의 대스승들의 사상을 많이 원용하였고, 종교 외의
면에서도 직간접적으로 붓다 이후에 출현한 여러 철인ㆍ 현자들의 사상을
그대로, 또는 일부 수정하여 원용하였다.

4. 본 작품에는 각주脚註ㆍ 후주後註 등 두 종류의 주석이 있다. 이중 각주에
서는 본문을 읽어나가는 데 필요한 단어 및 맥락을 간단히 설명하였고,
후주에는 긴 설명을 요하는 개념에 대해 보다 상세히 설명하였다. 이 두
주석은 불교 교리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을 위한 것이므로 불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있는 독자, 또는 본 작품에서 흥미와 감동만을 얻고자 하는
독자는 각주ㆍ 후주와는 상관없이 본문만을 읽어주시기 바란다.

《소설경》을 소개합니다

1. 해외 7개국 출판 결정

《소설경(小說經)》은 현재 영국의 다국적 출판사 놀리지 펜(Knowledge Pen)으로부터 출판 로브콜을 받아 계약의 마지막 단계와 와 있음. 잘 알려진 것처럼 놀리지 펜 출판사는 최근에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을 출판하기로 계약한 출판사임. 놀리지 펜은 《소설경》에 대한 영어권 전체에 대해 출판권을 갖기를 희망하고 있는데, 출판이 결정되면 먼저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러시아 일본 등 7개국에서 현지 출판하고, 나머지 영어권 국가에 대해서는 수출 방식으로 보급할 예정임.

2. 불교의 3대 대장경을 한 권으로 축약한 책

불교의 경전군(經典群)을 대장경(大藏經)이라 하는데, 대장경에는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전해오고 있는 빨리(P?li) 대장경(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 남방불교 권에서 신봉되고 있음), 빨리 대장경과 유사한 아함경(阿含經: 수많은 경전들의 집합임)을 포함하면서, 거기에 불멸(佛滅) 후 5백 년 경부터 발흥한 대승불교 경전들이 다수 포함된 한역(漢譯) 대장경(팔만대장경, 우리나라 해인사에 수장(收藏)되어 있는 그 대장경으로 인도어 원전은 빨리어가 아닌 산스크리트어임. 그러나 인도 본토에서 산스크리트어 원전이 거의 소실되어 버림으로써 원전이 없는 상태, 즉 번역서가 원전된 상태에 있음), 한역 대장경에 대승불교 후기 경전까지를 포함하는 티벳(Tibet) 대장경이 있음(대승불교는 전기 중기 후기 등 세 시기로 분별되는데, 한역 대장경은 대승불교 후기 경전을 포함하지 않고 있는데 비해, 티벳 대장경은 이를 포함하고 있음).
《소설경》은 이들 3대 대장경의 사상을 두루 수용하여 2백 자 원고 용지로 3천 4백 장으로 총정리한 작품임. 그 사상적 비율은 대체적으로 보아

가. 빨리 대장경 70%,
나. 한역 대장경과 티벳 대장경 20% 정도임.
다. 그런데 상기 ‘가’와 ‘나’는,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써 알 수 있듯이 ‘아함부’ 부분에서 중첩이 되고, 이는 ‘가’와 ‘나’를 합친다고 해도 약 20% 가량이 남는다는 것을 의미함. 즉, ‘가’와 ‘나’가 《소설경》에 수용된 퍼센티지는 80% 가량임. 그리하여 남는 20%는
라. 공자(유가) 사상 5% 가량
마. 예수(기독교) 사상 5% 가량
바. 기타(서양 철학 등) 사상 10% 가량으로 보충되어 있음. 이에는 작가 자신의 사상이 추가된 것은 별도로 잡아 추정한 것임.
아. 앞에서 예거한 사상들과 작가 자신이 그 사상에 추가한 사상의 비율을 작가는 약 7 : 3 정도로 보고 있음. 특히 작가의 사상은 ‘후주(136페이지 분량)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음.

3. 《단(丹)》의 작가 김정빈이 구도기(求道期) 25년을 결산하기 위해 문학으로 회귀하여 쓴 책(나아가, 불교만이 아닌 여타 종교들까지를 총망라하여 쓴 책)

《소설경》의 작가 김정빈은 1953년 생(행정 서류 상으로는 1952년 1월 28일생. 양력으로는 새해가 되었으나 음력으로는 지난해 섣달일 때 태어났음)으로, 1979년도 9월에 《현대문학》에 수필 1회 추천을 받고(추천자 조연현), 1980년도 3월에 완료 추천을 받았고(추천자 조경희), 1981년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분(작품 제목은 〈나무와 아이〉, 심사위원 이원수)에 당선하여 데뷔하였음. 1982년에는 계몽사가 신인 및 데뷔 10년 이내의 작가들을 대상을 공모한 계몽사 어린이 문학상 동시 부분에서 준당선하였고, 1983년에는 신춘문예 당선작을 개작한 책, 원고용지로 50장의 내용에 작가 자신이 직접 일러스트를 넣은 성인 동화 《기쁨으로 빛나는 나무》를 내었는데(120페이지), 이 책은 그해에 문화공보부 우수도서에 선정되었음. 이렇듯 문단 경력을 쌓아가던 당시 작가는 1979년 초부터 1982년 말까지 4년간 문학 전문 잡지 《한국문학》(대표 겸 주간 이근배 시인)에서 처음에는 영업 책임자로, 나중에는 편집자로 근무하였음. 영업 책임자이던 시절에 《한국문학》에서 김성동 작가의 소설 《만다라》가 발행되어 1989년도에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음.

이후 작가는 《한국문학》에서 나와 출판사 대학문화사의 편집장을 거쳐(약 1년간) 정신세계사의 편집장이 되었고, 그 뒤에는 신생 출판사였던 정신세계사를 위해 작가로서라기보다 한 직업인으로서 단 2주만에 쓴 책 《단》이 1984년도 11월에 나옴으로써 순수 문학의 길에서 벗어나게 되었음. 당시 출판계에서는 정비석 선생의 《소설 손자병법》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었는데, 《단》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2위에 오른 다음, 1985년부터는 1월부터 12월까지 내내 1위를 고수하며 총 50만 부 가량이 판매되었음. 참고로, 《단》은 한 권의 책이 출판(문학)계를 넘어 사회적인 영향을 끼친 드문 케이스로 남아 있음. 이 책이 사회에 끼친 영향은 (1) 이 책 이후에 단전호흡, 요가 등 정신적 영적인 수행(수련)이 일반화된 점, (2)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의해 시도되었던 한국사에 대한 식민사관을 가진 학자들이 주도하던 국사학계가 이 책에 힘입어 민족사관을 가진 학자들에게로 주도권이 넘어간 점 등임.

《단》의 성공은 작가에게 한편으로는 축복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의 짐이 되었음. 그것은 그동안 자신이 이상으로 삼아 왔던 수필에 있어서는 피천득, 동화에 있어서는 《어린 왕자》와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단》이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임. 이는 《단》의 실제 주인공인 권태훈(權泰勳) 옹의 사상이 그러했기 때문에 작가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었음. 또 한 가지 작가에게 《단》이 사상 면에서 (1) 도(道: 본질, 즉 초세속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길, 대승불교 용어로는 체[體])가 아닌 술(術: 부수적인 요소, 즉 세속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길, 대승불교 용어로는 용[用])에 중점이 두어져 있다는 점, (2) 민족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점(작가는 자신을 민족주의자이기보다는 세계주의자, 즉 민족이라는 가테고리에 넣을 수 없는 진리 추구자로 생각하고 있었음)이 마음에 걸렸음.

그리하여 상기 여러 사항에 대한 해소를 위해 1985년 3월, 인연이 닿아온 대행(大行) 스님을 만나 불교에 귀의하여 불제자가 되었음. 그때까지 작가는 불교에 대해(그리고 종교의 여러 스승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탐구는 하였지만 종교인은 아니었는데, 드디어 종교인이 된 것임. 참고로 작가는 어려서부터 (1) 문학, (2) 거룩[(聖] 등 두 축을 중심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삶의 가치를 추구해 왔음. 바꿔 말해서, 그때 작가가 불교인이 되었다는 것은 그때까지 (1)에 중심을 두어 오던 그의 삶이 (2) 쪽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그의 인생이 제2기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함. 이 제2기(구도기)에 그는 문학적인 책을 거의 내지 않았음. 그 대신 비(非)문학적인 글을, 특히 불교 마음 구도 수행 명상 등에 대한 책을 내었음. 그러다가 대행 스님의 교단에서 일한 지 4년 만에 교단을 나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 시절 대승불교에 대한 탐구를 끝내고 초기 불교로 돌아가는 사상을 갖게 되었기 때문임. 그리하여 그때부터 초기 불교에 입각한 위빠싸나 명상을 수행하기 시작했음. 그 과정에서 1990년에는 인도로 성지 순례를 다녀왔고, 1991년에는 여덟 달 동안 거해(巨海) 스님의, 빨리어에서 직접 번역한 최초의 《법구경 1, 2》(각 6백 페이지가 넘는 대작임)의 윤문을 담당하여 초기 불교에 대한 이해 및 당시의 승단 분위기에 심취할 수 있었고, 1992년에는 위빠싸나 명상의 본고장인 미얀마의 찬미에(Chamayey) 수도원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수행하였음. 이후 곧바로 위빠싸나 명상법을 현대인의 삶에 적용한 책 《마음을 다스리는 법》(둥지)을 출간했는데, 그 책은 약 10만 부 가량이 판매되는 성공을 거두었음.

2002년, 작가는 나이 쉰을 앞두고 공자의 ‘지천명(知天命)’을 음미한 결과 그것이 사생활을 버리고 공생활(公生活)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집을 떠나기 위해(가정 경제를 안정시켜주고 떠나기 위해) 버섯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 과정에서 도리여 경제적으로 큰 손실을 입었을 뿐아니라 인간의 악성(惡性)을 충격적으로 접하게 되었음. 이는 작가가 자신이 그동안 추구해오던 구도의 성격이 너무나 순진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므로, 작가는 이때부터 세속 가치, 즉 정치 군사 경제 등의 가치와 더불어 그동안 등한시했던 기타 가치, 즉 예술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음. 그때 낸 책으로 가장 널리 읽힌 책이 《리더의 아침을 여는 책》인 것으로써 알 수 있듯이, 이 시기는 작가의 ‘구도기 중의 세속기’로 분류할 만한 시기였음.

이 세속기에서 작가는 세속에도 세속 나름의 위대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적인 구도기(위빠싸나 명상기)’에 누렸던 나름의 마음의 평화가 적어지고 거칠어진 것을 알게 되어 다시 구도 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게 되었음. 그것이 2010년 여름쯤이며, 이때부터 작가는 지난 25년간(1985-2010년)의 구도기를 문학으로 총결산하꺸라고 생각하고 작품 구상에 착수하였음. 물론 본 작품 《소설경》과 유사한 ‘경전 문학’을 하려는 생각은 오래 전부터 해오고 있었으나 그것은 대체적인 구상이었을 뿐이었는데, 그것이 구체적인 구상으로 옮겨간 것임. 작가는 그동안 기독교 경전들은 문학적 형상화가 되어 있음에 비해(즉, 모두가 이야기로 되어 있다시피 한데 비해) 불교 경전은 거의 그렇지 않다는 점, 《금강경》 《반야심경》에서 보듯이 난해한 교설만을 전개하고 있는 점에 불만을 느껴오고 있었음. 이에 대응하여 작가는 불교를 단순히 ‘소설’의 소재로만 다룰 것이 아니라 ‘경전’의 형식으로 전개하고 싶어 하였음. 이는 대승불교 경전들이 전해오는 경전들의 사상을 바탕으로 후대인에 의해 ‘창작’된 것을 원용한 것임. 다만, 그들 경전들은 창작가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후대인들이 ‘불설(佛說)’로 오인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어떤 면 정직하지 못한 면이 있으므로 작가는 ‘경’을 쓰되 그것이 글자 그대로의 경이 아니라 한 작가가 창작한 경임을 명시하여, 내용에 오차가 있을 경우 그 책임을 작가가 지기로 한 것임. 그리하여 구상이 끝나고 2010년 12월 31일 새벽부터 집필이 시작되었는데, 당시 ‘경전 문학 시리즈’를 구상하고 있었던 작가는 처음에는 《신본경(神本經, 神本記)》라는 이름으로 기독교를 다룬 경전 문학을, 그 다음에는 《인본경(人本經, 人本記)》라는 이름으로 유가 도가를 비롯한 중국 사상을 다룬 경전 문학을 쓴 다음 마지막으로 불교에 이들 사상을 모두 수용한 작품 《대교향경(大交響經)》을 쓰려고 했었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열흘 만에) 마음을 바꿔 불교를 먼저 다루기로 했음. 그 뒤로도 작품의 구상 및 성격은 큰 틀에서는 같았으나 세부적인 면에서는 여러 차례 변화를 겪어 현재의 《소설경》이 완성되었음. 따라서 작가의 구도기는 작품 창작에 걸린 2년을 제할 경우 25년이 되고, 이를 포함할 경우 27년이 됨. 향후 작가는 계속하여 경전 문학 시리즈를 이어갈 계획을 갖고 있음. 다음 작품은 중국 사상을 다룬 작품이 되거나, 성자 현인 군자들의 이야기 모음집이 될 것이며(작가는 이미 1989년에《성자들의 마을》이라는 우화집을 내어 십만 부 가량 판매한 기록이 있음), 그 성격은 처음(2010년)에 구상했던 것과는 큰 틀에서는 같다고 해도 구체적인 면에서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 예상됨.

* 참고로, 불교를 소재로 한 소설은 그동안 자주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음. 이광수의 《원효대사》, 김성동의 《만다라》, 남지심의 《우담바라》, 최인호의 《길없는 길》, 고은의 《화엄경》, 정찬주의 《소설 성철》 등. 그러나 이번 김정빈의 《소설경》 이들 저작과 큰 틀에서는 같으나 몇 가지 점에서는 다름.

가. 이들 저작에는 불교 교리가 거의 드러나지 않음. 바꿔 말해서, 이들 저작에서 불교는 ‘소재’이지만 《소설경》에서 불교는 ‘주제’임.

나. 앞의 항 ‘가’의 보다 구체적인 의미에서, 이들 저작에는 ‘수행’이 중요시되지 않지만 《소설경》에서는 수행이 매우 중요함. 바꿔 말해서, 《소설경》은 불교의 이상경(理想境)인 열반(涅槃, nibb?na)이 단지 이상으로서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현 가능하다는 신념이 반영되어 있음. 나아가, 불교의 가르침이 지금-여기(hear and now)에서의 우리의 삶에도 곧바로 적용될 수 있다는 패러다임에 입각해 있음. 이는 예를 들어, 《만다라》의 주인공이 애욕에 갈등하다가 결국 환속하고 마는, 어떤 면 불교 수행에 대한 허무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음에 비해 《소설경》의 주인공들은 그와는 방대로 불교의 수행법을 통해 애욕을 포함하는 ‘삶의 모든 괴로움[苦, dukkha]’을 초극하여 열반을 실현하고 있음.

다. 이같은 상이(相異)는 전자의 모든 책들의 저자가 불교권의 사람이 아니거나(최인호 작가) 수행자는 아닌데 비해 《소설경》의 작가는 전적으로 불교권 사람이며, 나아가 구도자 내지는 수행자로서 자신의 삶을 불교에 던진 사람, 즉 직접 명상 수행을 하고 지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임. 바꿔 말해서, 《소설경》의 작가는 불교, 특히 불교가 마지막으로 제시하는 위빠싸나(vipassana) 명상법을 실천, 수행하면서 불교가 단순히 ‘믿음의 종교’인 것이 아니라 “와서 보라고 말할 만한 진리”, 즉 자명(自明) 자증(自證)한 ‘앎(깨달음)의 진리’라는 것을 증험한 데서 생긴 것임(본문 각주 ‘믿음/앎’과 ‘자명 자증’ 참조).

4. 《소설경》의 문학 작품으로서의 성격적 특성

부첨 자료 ‘《소설경》의 문학적 관점에서의 요점 정리’ 참조.

5. 《소설경》이 던지는 사회적인 메시지(해법)

이미 말한 것처럼 작가의 작품 《단》은 대(對) 사회적인 영향 면에서는 주목할 만한 결과를 도출했음. 그런 의미에서 《소설경》에는 어떤 사회적인 메시지가 있는지를 추리해보는 것도 의미 없는 일만은 아닐 듯함.

가. 조계종 사태

먼저 요즘 조계종 사태에서 보는 것처럼, 현재 한국 불교는 겉으로는 명맥을 유지해가고 있지만 내부적으로 보면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 이에 대해 작가는 직접 조계종 등을 거론하고 있지는 않으나 불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한편으로는 문학적 형상화를 통해 그 이상형을 제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주를 통해 직접적으로 논술하고 있음. 이에 대해서는 소설 본문에 나타난 초기 불교의 아름답고 고상했던 모습과 후주 ‘불교의 승단 제도’ 즉, 붓다가 율(律, vinaya)을 통해 (1) 권력과 이익을 탐하는 쪽으로 타락하기 쉬운 상위 지도부를 두는 인치(人治) 대신 그것을 두지 않는 법치(法治)를 선택했다는 점(그러나 조계종은 상위 지도부인 종정과 총무원장을 두고 있음. 그에 비해 남방불교는 조계종의 종정에 해당되는 승려, 총무원장에 해당되는 승려가 없음), (2) 승려가 되기도 싶고 그만두기도 쉽도록 하여 승단 내부가 ‘공개’되도록 함으로써 부패를 막도록 한 점을 참고해야 함(이에 대해서는 조계종이 승려가 되기가 어렵도록 정하고 있는 점, 즉 행자 기간을 요구하고, 쉰 살 이상의 사람은 받지 않는 점과, 승려가 된 사람이 승려를 그만두는 경우 정당히 환계[還戒]를 하는 것이 아니라 비법적[非法的]으로 파계[破戒]를 한 것처럼 보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는 점을 비교해 보아야 함)을 지적하고 있음. 이에 비해 초기 불교의 교단 운영 방식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는 남방불교의 경우 태국에 30만, 미얀마에 30만, 두 나라만으로 60만 명이나 되는 비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만 3천 명에 불과한 한국 조계종보다 훨씬 조용한, 조용한 정도가 아니라 아무 문제가 없이 무려 2천 5백 년간이나 훌륭히 불교를 지탱해 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함.

나. 종교 일반의 문제

조계종 사태는 단순히 조계종, 또는 불교만의 사태는 아님. 이는 우리나라 종교계 전반의 문제임. 돌이켜보면 해방 이후 우리 사회는 하나씩하나씩 ‘성역’을 무너뜨려 왔음.
맨처음 무너진 성역은 정치적 성역임. 즉, 이승만을 비롯하여 독립 운동가라는 이름의 성역에 있었던 이들이 실제로 집권을 하게 되자 추악한 면을 드러냄으로써 국민들은 독립 운동가, 또는 정치 지도자들의 성역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음(이는 일종의 ‘토사구팽(兎死狗烹)’ 현상임).
두 번째로, 언론인들의 성역이 무너졌음. 처음, 언론인들은 ‘민중의 지팡이’로 국민들의 존경을 받았음. 그러나 일제가 무너지고, 독재 정권이 무너지자 국민들에게는 언론이 겁 많은 자신들을 위해 대신 올바른 말을 해줄 사람이 필요 없게 되었고(이 또한 토사구팽임), 언론인들 또한 앞에서 본 정치가들과 유사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언론인을 ‘무지개 안경’을 쓰고 바라보던 시각이 교정된 것임.
세 번째로 스승(학자 교수)들의 성역이 무너졌음. 처음, 우리 국민들은 학자(교사), 하면 퇴계와 율곡 등이 연상되는 ‘스승’을 떠올렸음. 그러나 대학을 대표하는 대학 총장들까지도, 또한 수많은 교수들까지도 정치를 비롯한 ‘이익’을 쟁투하는 여러 정황에 의해 국민들은 스승들의 성역을 인정하지 않게 되었음.
이밖에도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지만, 아무튼 지금까지도 무너지지 않고 있는 마지막 성역이 종교계임. 이는 종교계가 정치와 법조차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임. 즉, 종교인들은 작가가 후주 ‘산냐’에 의해 형성된 강력한 고정 관념을 갖고 있어서 자신들이 침해받는다고 생각하면 법을 제정(국회의원 지방 의원) 집행하는 이(대통령 지방 자치 단체장)에게 표를 주지 않음. 이는 민주주의의 우중정치(愚衆政治) 현상인데, 이를 교정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민주의식이 성숙되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음. 이에 대해 본 《소설경》은 나름대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됨. 이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이 책의 장점은 앞에서 말한 후주 ‘산냐’에서의 논의, 즉 종교적 신념이라는 것은 컴퓨터에 입력된 CD 데이터 같은 것으로서 가변적인 것이기 때문에 ‘진리’는 아니라는 것, 진리는 CD 데이터가 아니라 그 데이터를 입력 받아 출력하는 과정으로서의 심법(心法)이라는 점을 지적한 부분이 될 것임. 이렇게 하여 《소설경》은 단순히 조계종이나 불교만이 아닌, 기독교를 비롯하여 여타 군소 종단들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여러 병폐들에 대한 분석을(해법까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음.

다. ‘넓은 의미의 종교’의 문제

앞에 예거한 ‘산냐’는 비단 종교인의 경우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님. 바꿔 말해서, 어떤 사람이 어떤 신념으로 똘똘 뭉쳐 있을 경우, 즉 무슨무슨 주의자(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 금전만능주의자 등)들은 모두 넓은 의미의 종교임.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근래에 수많은 무슨무슨 주의자들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보고 있는데, 이 또한 본 작품의 ‘산냐’에 대한 설명을 잘 음미함으로써 그 행태들을 이해할 수도 있고, 그 해법을 찾아나갈 수도 있을 것으로 예상됨.

라. 종교적 믿음의 본질에 관한 문제

본 작품은 종교 진리가 글자 그대로의 진리, 즉 3에 3을 곱하면 9가 되는 것 같은 진리가 아니라 ‘결심의 진리’라는 것, 따라서 내가 갑이라는 종교 진리를 믿기로 결심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는 것처럼 너는 을이라는 종교 진리를 믿기로 결심할 수 있는 자유를 갖고 있다는 것을 자세히 논증하고 있음(후주 ‘종교를 믿는다는 것’ 참조). 이는 본 작품이 종교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길(논리)을 제시하고 있음을 의미함.

마. ‘티와 들보’의 문제

예수는 “남의 눈의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꾸짖었음. 이를 공자로 옮기면 “소인은 잘못의 원인을 남에게서 찾고, 군자는 자신에게서 찾는다”가 되고, 붓다로 옮기면 사성제에서 문제의 원인으로 진단된 무지(무명)와 욕망(갈애)이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의 무지 무명인 것이 됨. 작가는 본 작품에서 이 주제― 즉, ‘문제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것’에 대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그렇게 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심도깊게 토론함.
누구나 아는 것처럼 지금 한국 사회는 잘못의 원인을 타자에게로 돌리는 현상이 만연해 있음. 정치에서는 나의 잘못을 로맨스, 너의 잘못은 불륜이라는 식의 상대방에 대한 비난이 봇물을 이루고 있고, 경제 면에서도 사용자와 노동자 같에 거의 같은 현상이 비일비재 일어나고 있으며,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그러함. 이 점에 대해 본 작품이 제시하는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기’, 최소한 서로 사랑하는 사람 간에는 그래야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음.

바. 영적(靈的) 건강의 문제

본 작품의 분위기는 영적(靈的)으로 매우 고양(高揚)되어 있음. 따라서 만일이라도 본 작품이 《단》처럼 베스트셀러가 된다면 세속적 이익을 추구하느라 영적인 면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 않은, 그 점에서 아마도 세계의 어느 나라보다도 더 심각한 것으로 판단되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리라고 생각됨.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UN 세계 보건 기구는 건강하다는 것의 정의에 ‘영적인 건강’을 포함시켜 놓고 있음.

사. 과욕의 문제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 상태는 세계의 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도 성취 동기가 강함. 이것은 좋게 표현해서 그런 것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의 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욕심이 많음. 이 때문에 많은 성취와 함께 많은 사회 문제도 생겨나고 있는데, 본 작품은 후주 ‘마음은 무언가를 바란다’에서 자세히 이 문제를 자세히 논하고 있음.

아. ‘느린 삶’의 문제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에게 퍼뜨린 말 중에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빨리 빨리’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음. 이 점에 대해 이 책의 내용은 그를 느린 쪽으로 붙들어주는 명상, 그중에서도 위빠싸나 명상이 중심을 이루는 사상으로 편성되어 있음. 위빠싸나 명상은 최근에 어느 신문 기사에도 실린 것처럼 밥을 먹을 때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입안의 음식이 물이 될 때까지 씹으면서 입안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알아차리는(관찰하는) 방법 등을 통해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명상 체험, 내지는 생활의 명상화를 유도하는 방법 등으로 실천되고 있기도 함. 즉, 본 작품은 한국인들에게 느린 삶의 가치를 실제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직간접적인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음.

작가 자신이 밝히는《소설경》의 문학적 관점에서의 요점 정리

1. 제목

《소설경(小說經)》이라는 제목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가. 대장경을 대설경(大說經: 크게 설해진 경전)으로 보았을 때 소설가에 의해 작게 설해졌다는 의미(‘작가의 말 ’참조, 《소설경(小說經)》: 두 단어를 붙여 씀).

나. 소설로 씌어진, 불교의 3대 대장경을 한 권에 축약했다는 의미(《소설 경(小說 經)》: 두 단어를 띄어 씀).

다. 소설로 씌어진, 불교 경전 및 불교 밖의 인류의 수많은 경전 모두 담았다는 의미(다음 항목 참조, 《소설 경(小說 經)》: 두 단어를 띄어 씀).

라. 《금강경(金剛經)》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처럼, 붓다의 근본 교설인 빨리(P?li) 대장경(또는 전해오던 더 오래된 경전)에 근거하여 작가(자신이 속하는 종교 집단, 예를 들어 《금강경》을 창작한 대승불교의 반야(般若) 사상을 가진 집단. 대승불교의 경전들은 그렇게 창작된 것들임. 다만 그들은 창작된 경전들을 ‘김정빈 지음’이라고 표기하지 않고 그냥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행동하셨다)”고 적음으로써 후대인들이 그것을 붓다의 금구친설(金口親說)로 믿어온 것임)가 창작한 경전이라는 의미(《소설경(小說經)》: 두 단어를 붙여 씀).

* 참고로, 서양에서 《신 구약 성경》 《꾸?(코란)》의 자료들이 정경(正經)과 위경(僞經)으로 분별되어 정립된 이후 한 개인이 경전을 집필한 사례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앞에서 말한 대승불교가들 이외에도 중국인들은 《불설 부모은중경(佛說父母恩重經)》 《원각경(圓覺經)》 《법보단경(法寶壇經)》등을 창작한 사례가 있고(제목에 ‘불설’이라는 말이 붙은 경은 거의가 다 창작된 경전들임), 불교 밖에서는 《산해경(山海經)》 《다경(茶經)》 등의 용례가 있습니다.

* 《소설경》은 현재 영국 놀리지펜(Knowledge Pen) 출판사에 의해 영어권 7개국 출판이 결정되어 있는 상태인 바, 영어 제목은 《The Snow Mountain, 雪山》으로 바뀔 예정입니다(단, 번역자들과 상의하여 바뀔 가능성이 있습니다).

2. 작품에 이용된 경전들(사상)의 비율

저는 이 작품을 단지 불교 사상만으로 집필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작품이 불교(붓다) 사상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중심이 아닌 ‘보조’의 면에서 불교 밖의 여러 사상이 원용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는 대체적으로 보아 이 작품이

빨리 대장경(남방불교에서 신봉되고 있는, 붓다의 교설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경전군[經典群]) 70%

한역 대장경(漢譯大藏經, 팔만대장경) 20% (3대 대장경 중 한역대장경과 티벳은 거의 그대로 겹침)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두(세) 대장경으로써 90%가 채워지지만 총 10부(部)로 분별되는 한역 대장경의 아함부(阿含部) 경전들은(매우 많은 수많은 경들의 집합임) 빨리 대장경과 대동소이하게 중첩됩니다. 따라서 본 작품의 사상은 이 두 대장경의 사상이 약 80%를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렇게 하여 남는 20% 중

공자(儒家) 사상 5%,
예수(기독교) 사상 5%,
기타 인류의 여러 스승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등의 사상이 10% 정도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외부로부터 유입된 사상이 그렇다는 것이고, 이들 모든 사상을 70% 정도로 삼은 다음 저의 사상이 약 30% 가량 더해져서 본 작품은 쓰여졌습니다.

3. 작가가 25년 간의 구도(求道)의 결과를 문학화한 작품

저는 1980년 《현대문학》에 수필, 1981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동화, 1982년에 계몽사 어린이 문학상에 동시로 등단하였습니다. 1983년에 첫책 《기쁨으로 빛나는 나무》(제가 손수 일러스트를 하여 낸, 120페이지 짜리 작은 책, 그해 문화공보부 우수도서에 뽑힘)를 낸 다음 1984년 11월에 두 번째 책으로 비(非) 문학 작품인 《단(丹)》을 내었는데, 이 책이 다음해에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의 성공은 저에게 마음의 부담이 되었는데, 그것은《단》이

가. 비문학이라는 점
나. 도(道: 본질, 즉 깨달음, 또는 마음의 행복 자체: 자기 자신에 대한 영향의 면)가 아닌 술(術: 부수적인 것, 즉 신통력: 타자에 대한 영향의 면)에 중심이 두어진 소설이라는 점(소설의 주인공이 그런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찌할 수 없었음, 이 점에 대해서는 소설 본문 중 각주 ‘신통’ 조를 참조할 것)
다. 민족 사상을 강조하는 책이라는 점(저는 저 자신을 민족주의자이기보다는 세계주의자로 보고 있었음)

등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마음의 부담을 풀기 위해 도(道)를 제대로 다루고 싶은 욕구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1985년 3월에 불교에 귀의하였고(그때까지 불교를 애호하기는 했지만 불교 신자는 아니었음), 대행(大行) 스님의 일생을 다룬 책 《도(道)》, 가르침을 다룬 책 《무(無)》무 등을 발표하였습니다.

이때부터 대행 스님 교단에 상주하면서 4년간 불교에 대해 내재적(內在的)으로 탐구한 결과(종교의 ‘내재적’ 및 ‘외재적’ 탐구에 대해서는 후주 ‘종교를 믿는다는 것’ 참조) 한국 불교, 또는 대승불교의 방만성에서 큰 혼란을 느껴 초기 불교(근본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비유하면 강의 하류에서 해매지 말고 상류, 또는 수원지(水源池)에서부터 불교를 탐구하자는, 먼저 알아야 할 것을 먼저 알고, 나중 알아야 할 것은 뒤로 미루는 방식으로 불교를 재탐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대승불교, 또는 중국 한국 일본 티벳에 전해지는 불교보다는 남방불교, 즉 스리랑카 태국 미얀마 등에 전해져오는 불교가, 또 그들 불교가 경전으로 삼고 있는 빨리 경전이 붓다의 가르침을 가장 원형에 가깝게 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여 빨리 경전을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그 결과 붓다의 애초의 가르침은 단순하고, 소박하며, 실천적이고, 고상하고, 아름답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본 작품에서 중심을 이루는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라는 것, 팔정도의 핵심은 일곱 번째 덕목인 정념(正念, samma sati)이라는 것, 그중에서도 위빠싸나(vipassana) 명상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그때의 결과물은 《근본불교의 가르침》이라는 책으로 정리해 발표했습니다).

그때는 마침 위빠싸나 명상법이 거해(巨海) 스님에 의해 막 한국에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사상이 바뀌었으므로 4년 만에 대행 스님을 떠난 저는 그때부터 위빠싸나 명상을 수행하였습니다(1989년). 그러다가 1991년에 거해 스님의 《법구경》 (《법구경》 원문과 이 경전이 설해지게 된 배경 이야기를 담은 책) 원고를 8개월 간 윤문하여 고려원 출판사에서 내는데 일조하였습니다(저는 공동 번역자로 제 이름을 올리자는 스님의 제안을 사양했습니다). 저는 그때 8개월간 매일 8시간씩 붓다의 사상 및 붓다 당시의 불교 분위기에 흠뻑 젖음으로써 불교에 대한 신심을 증장하였고, 그것이 오늘날 《소설경》을 쓰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고려원 판 《법구경》의 원고 량은 6백여 페이지 두 권 분량으로 대략 원교용지로 5처 장이 넘음). 이후 저는 미얀마의 찬미에(Chamayey) 수도원에 승려가 되어 수행하는 등 위빠싸나 명상을 보다 더 심도 있게 공부하였고, 미얀마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삼성 연수원 등에서 명상에 대해 강의하고, 현대인이 알기 쉽게 이 명상법을 해설한 책 《마음을 다스리는 법》(둥지)을 펴냈습니다(약 10만 부 가량 판매되었음).

이렇듯 저의 구도가 진행되는 동안 작가는 문학에 대한 저작은 ‘거의’ 발표하지 않고(‘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마음과 구도에 대한 저작만을 비문학 언어로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다가 2002년에 나이 쉰을 앞두고 공자님의 ‘지천명(知天命)’의 의미를 숙고한 끝에 그것은 사생활을 버리고 공생활(公生活)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리하여 집을 떠나 수도자가 되기 위해 가정 경제를 최소한으로나마 안정시키기 위해 어떤 이와 동업으로 버섯 사업을 벌였는데(사업이 잘 되면 그와 아내가 경영을 할 수 있도록) 그 사업은 실패하였고, 그 과정에서 사람의 악성(惡性)을 통절하게 경험하였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그동안 제가 너무나 순진하게 진리를 추구했다는 점을 자각하게 되어 그때부터는 그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무시하고 있었던) 종교 아닌 인간의 활동들(사실 그때 저는 문학을 비롯한 예술조차도 ‘세속’에 속하는 것으로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이때의 배움에 대해서는 저의 책《김정빈의 마음 공부》 참조). 그리하여 그때부터 종교 위인 만이 아닌(저는 비단 불교 스승만을 존경해온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 스승들 및 인류의 모든 현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를 이끌어온 두 축은 ‘문학’과 ‘거룩[聖]’입니다), 정치 군사 등의 위인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상 말한 것처럼 저의 구도 역정은 1985년부터 2010년 여름까지 총 25년간 계속되었습니다. 2010년 여름, 저는 그동안의 구도의 결과를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하기로 결심하고 구상에 착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해 12월 31일 새벽에 집필을 시작했는데, 당시 저는 ‘경전 문학 시리즈’를 쓰리라는 구상 하에 가장 먼저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신본경(神本經, 神本記)》을 쓴 다음 두 번째로 유가(儒家) 도가(道家) 등 중국 사상을 바탕으로 《인본경(人本經, 人本記)》을 쓰고, 마지막으로 이들을 불교 사상 하에 총합, 수렴하여 《대교향경(大交響經)》을 쓰려고 마음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작품을 시작한 지 열흘쯤 뒤에 생각이 바뀌어 저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불교를 먼저 쓰기로 마음을 바꾸었는데, 그 결과물이 현재의 《소설경》입니다.

4. 자기 구원(自己救援)의 문학

문학에서 가장 크고, 넓고, 위대한 주제는 서양의 문학 용어로 말하면 ‘인간 구원(人間救援)’이라는 주제입니다(그러나 이 용어에는 ‘신에 의한 인간 구원’이라는 의미가 배경에 깔려 있기 때문에 불교, 또는 동양 사상의 입장에서는 ‘자기 구원[구제]’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인간 구원이라는 대주제를 다루려면 첫 번째로는 인간의 모든 활동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활동들, 그 활동들의 배경으로서의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을 총망라, 요약해야 하고, 두 번째로는 그것들을 문학 언어로 형상화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는 문학적 천재들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는데, 이 때문에 서양의 4대 문학 천재들― 고대의 호머, 중세의 단테, 르네상스기의 셰익스피어, 근대의 괴테를 보더라도 인간 구원의 문학을 창작한 작가는 단테(《신곡(神曲》)와 괴테(《파우스트》) 밖에 없습니다. 문학의 4대 천재에 준하는 대천재로 19세기 문학의 거봉인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가 있는데, 톨스토이는 인간 구원의 문학을 정면으로는 다루지 않았습니다. 톨스토이의 《부활》의 후반부에 그에 대한 암시가 있고, 이 사상이 간디의 비폭력 저항을 유도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그대로입니다. 또한 톨스토이는 후반기 우화 작품들, 예를 들어 《바보 이반》 등에서 인간 구원의 문제? 다루었지만 역시 앞의 대가들인 단테와 괴테에 비해서 규모 면에서나 문학적 형상화의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습니다. 그 부족 부분을 톨스토이는 비문학을 통해 이 문제를 다루었는데, 그의 책 《참회》 《인생론》 《인생 독본》등이 그것입니다. 한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은 톨스토이의 저작에 비해 인간 구원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점이 있으나, 그것은 톨스토이에 비해 그렇다는 것뿐으로 단테와 괴테에 비해서는 정면으로 다루었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들 대작들― 단테의 《신곡》, 괴테의 《파우스트》,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가. 지난 시대의,
나.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입니다(괴테의 《파우스트》는 보기에 따라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일정 정도는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이 사실이고, 최소한 기독교를 배경으로 하는 서양 문화권 전체를 넘어서 있지 않은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시대, 기독교가 아닌 사상, 특히 동양 문명의 정수인 불교를 배경으로 하는 자기 구원의 문학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는데, 동양 문명에서는 아직까지 인간 구원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 없었습니다. 작가는 서양의 4대(6대) 문학가의 작품과 비견할 만한 작품을 동양에서 찾을 경우 중동의 《아라비안나이트》와 중국의 《삼국지》를 꼽아야 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또는 인도의 《마하바라타》) . 그러나 이들 두 작품은 인간의 삶의 다양다기한 양상을 형상화한 점에서는 가히 그 안에 하나의 ‘세계’가 있다고 할 만한, 서양의 4대(6대) 문학가들이 구축해 놓은 문학적 ‘세계’에 비해 손색이 없는 대작품이지만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런 정황에서 동양 문화권에서는 처음으로 자기 구원의 문학인 《소설경》이 나온 것입니다.

인간 구원의 문학은 서양 문학에서도 괴테 이후 성공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와 《유리알 유희》, 로맹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 등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결정적으로 성공한 사례는 없고, 그들 작품은 규모 면에서 《신곡》 《파우스트》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고, 격조 면에서도 고귀함과 숭고함의 차원도 그리 높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 백 명이 넘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 중에도 제대로 된 구원의 문학을 쓴 작가가(작품이) 없는 이유는 현대에 이르러 인류가 보유한 지식의 양이 급팽창하였기 때문입니다. 단테 시대에 단테는 당시 인류가 보지하고 있던 지식의 ‘거의 전부’를 알았고, 괴테 또한 그에 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인류가 보지하고 있는 지식의 양은 괴테 시대에 비해서는 천 배, 단테 시대에 비해서는 십만 배쯤 늘었기 때문에 이를 모두 총합, 정리하지 않고서는 구원의 문학을 창작할 수 없다는 점에서 구원의 문학이 실종되어버린 것은 당연합니다. 그 결과 현대의 문학은 구원의 문학 같은 거대 담론을 버리고 미시적이고 국부적인 주제만을 다루게 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소설경》이 등장한 것은 그 성공 여부는 둘째 치고라도 문학 사상사적인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제가 혹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리고 만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특히 그것이 동양에서 시도되었다는 점, 불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바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꿔 말해서, 《소설경》은 나름대로 현대의 모든 지식을 불교 사상으로 총합,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노벨상 수상 작가들도 하지 못한 대작업을 저는 어떻게 감히 할 수 있었을까요?(제가 그에 성공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앞선 문학가들에 비해 우수해서가 아니라 붓다의 사상이 그만큼 위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붓다는 인간의 삶의 문제를 ‘괴로움과 그것의 지멸(止滅)’로 단순히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괴로움과 지멸이라는 두 항목에 대해 각각 원인을 찾아냄으로써 인간의 모든 문제는 결국 사성제, 즉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지멸(소멸)
괴로움의 지멸로 인도하는 방법

등 네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이것이 ‘사성제(四聖諦)’입니다만(후주 ‘사성제’로 참조), 이 붓다의 사상은 시대가 아무리 변한다고 해도, 인류가 보지한 지식의 양이 지금보다 만 배로 더 많아진다고 해도 바뀌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 사성제를 검토 음미 숙고 적용 실천 점검 비판(되새김)함으로써 본 작품을 쓸 수 있었습니다.

5. 조화(調和)

소설은 문학이고, 문학은 예술이며, 예술은 ‘조화’입니다. 따라서 저는 본 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조화에 유념하였습니다.

가. 문학 예술 언어와 철학 언어의 조화

가-1
언어는 본래 의미 전달을 위해 생겨난 것인 바, 이 부분을 가장 극치까지 활용하는 인간 활동은 철학입니다. 그러나 언어는 의미 전달이라는 제1차적인 용도를 넘어 제2차적으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문학 언어인데, 이때 언어는 비유 상징 비약 역설 윤율 등을 통해 듣는 이에게 제1차 언어로는 기대할 수 없는, 또는 말하는 이가 의도하지 않았던 심상(心象)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문학 언어의 소재인 언어가 음악의 소재인 소리나 미술의 소재인 색채 및 형태와는 달리, 즉 그것들이 물질적인 소재인데 비해 정신적인 소재라는 점 때문에 문학은 필연적으로 철학성을 갖게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위대한 문학가는 다 철학자를 겸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인데, 이는 다시, 문학 창작자가로 하여금 자신의 작품에서 문학 예술 언어 대(對) 철학 언어의 비율을 얼마 만큼으로 잡을 것인가를 결정하도록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 저는 먼저 총 5부로 편성되어 있는 본 작품의 마지막 부를 후주로 삼아, 언어를 제1차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또한 본 작품에는 소설 본문에도 456 개의 각주가 있는데, 이 또한 언어를 제1차적으로 사용한 부분입니다. 이로써 본 작품은 문학 예술 언어 대 철학 언어의 비율이 6 : 4(또는7 : 3)가 되었습니다.

가-2
본 작품 소설 부분(앞의 6, 또는 7부분)에는 붓다와 붓다의 위대한 제자들이 비유 상징 비약 역설 윤율 등을 통하지 않고(또는 적게만 이용하면서) ‘직접 설법’하는 부분이 약 30퍼센트 정도 있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문학 작품에 비해서는 매우 많은 편이지만(셰익스피어의 작품에는 그런 데가 거의 없습니다. 혹 작중 인물이 인생의 잠언(箴言)을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중 인물이 처한 상황에 알맞추어 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 언어는 제가 말하는 언어의 제1차적인 용법으로 쓴 것이 아닙니다), ‘관념 소설’이라 불리는 작품들,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에 비해서는 그리 높은 편만은 아닙니다.

나. 시-언어와 산문-언어의 조화

앞의 항목을 문학 예술 언어 쪽으로 좁히면, 문학 언어는 시-언어와 산문-언어로 대별됩니다. 이중 시-언어는 비교적으로 보아 언어의 제2차적인 용법에 가깝고, 산문-언어는 제1차적인 용법에 가깝습니다. 산문-언어는 본 작품과 같은 소설(서사 문학)에서 주로 쓰입니다. 그러나 저는 소설에 시가 들어오는 것이 예술성을 보다 높인다는 점을 고려하여, 또한 붓다의 사상이 잘 표현되어 있는 시(게송)들이 있음을 고려하여 작품 속에 시를 풍부히 배치하였습니다. 또한 산문(지문)을 구사함에 있어서도 윤율 반복법 점층법 등 여러 기법을 사용하여 시적인 효과가 풍부히 나타나도록 했습니다.

다. 예술의 네 가지 미(美)의 조화

N. 하르트만의 예술 이론에 따르면 예술미에는 (1) 비애미(비극미), (2) 우아미, (3) 숭고미(異種美), (4) 해학미(유머의 미, 희극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한 작품에 이 미들이 잘 조화를 이룬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1)과 (4)는 공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능한 한까지 이들을 조화시키기로 했는데, 그 결과 저는 본 작품에서 이들 네 요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이번 작품에 비애미가 있는 것과 숭고미가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그 수준은 차치하고 말입니다). 우아미의 경우, 저는 우아함의 본질을 ‘조화’로 봅니다. 그런데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저는 여러 면에서 조화에 유념하여 이 작품을 썼으니만큼 우아미 또한 없지 않다고 봅니다. 문제는 해학미인데, 이 작품에 유머(해학)라고 할 만한 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두 군데 유머를 넣어두긴 했는데, 그중 하나는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인 밧디야가 목을 매달려 하는 욱가따 노인에게 던지는 유머이고, 다른 하나는 가장 중심이 되는 주인공인 빙기사가 붓다에게 기를 받은 다음 자신의 눈을 찌는 밧디야게 ‘당신에 예전에 심안이 멀어 있는 나의 육안을 찌른 것은 하릴 없는 일이었다’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더하여, 붓다는 자신의 제자 말루카 비구에게 유머가 섞여 있는 부드러운 농담을 던지기도 합니다.

라. 천상계와 인간계의 조화

이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은 단테의 《신곡》입니다. 저는 단테의 이 불멸의 걸작을 소년 시절에 읽었고(지금도 그때 그 책을 갖고 있습니다. 청계천 7가 헌책방에서 산, 판권에 본래의 정가를 지우고 볼펜으로 500원이라고 적어놓은 그 책을 말입니다), 책의 맨 앞페이지 시들을 그 시절에 왼 이래로 사십여 년 지난 지금까지도 외고 있습니다. 일곱 페이지의 본 작품이 나오면 세 페이지가 주석으로 따라붙는 이 작품을 저는 그 당시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었습니다(지금도 충분히 이해, 또는 감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탈리아어를 모르니까요. 그러던 중 재작년에 《단테 신곡 강의》라는 책을 만나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읽게 되었고, 그를 통해 이 작품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긴해도 ? 당시에도 저는 “아! 여기에는 위대한 어떤 것, 숭고한 어떤 것이 있다!”라는 것만은 분명히 ‘느꼈습니다.’
《신곡》은 지옥편 33편, 연옥편 33편, 천국편 33편, 서장 1편, 총 100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점에서 불교 또한 지옥(아귀 수라 축생) 등 낮은 세계와, 인간이라는 중간 세계, 하늘[天]이라는 높은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인간계보다 천상계가 중요하지만 불교에서 인간계가 천상계보다 더 특별한 곳으로서, 여기에서 수행을 잘 하면 하늘세계보다도 더 높은 깨달음의 세계(경지)에 들 수 있습니다. 즉,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중심이 되는 인간계입니다. 또한 저는 지옥계가 있기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 세계는 있기를 바라는데, 제가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소설 각주에도 적어 넣은 것처럼 평생을 고생만 하신, 더 이상 선한 인간을 상상하기 어려웠던, 그러나 이생에서는 행복을 누려보지 못한 저의 어머니 때문입니다. 이같은 저의(불교의) 세계관에 따라 저는 이 작품에서 인간계를 80-90%, 천상계를 10-20%의 비율로 잡고, 지옥에 대해서는 간접적으로만(밧디야의 꿈, 지옥에서 온 추추의 고백 등) 묘사했습니다. 그런 다음 천상계에서 서사를 시작하여 인간계에서 마무리되도록 하였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천상계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신들이 인간계로 내려와 인간인 붓다와 장차 붓다가 될 빙기사 보살을 찬탄하도록 했습니다.

마. 세간과 출세간의 조화

불교에서 앞의 분류(천상계와 인간계)보다 중요한 것은 세간(세속)과 출세간(出世間: 세속을 벗어남, 또는 세간을 벗어난 곳)의 분류입니다. 출세간이란 출가한 비구(비구니)들, 또는 그들이 사는 곳인 승단, 또는 세간에서 벗어난, 비구는 되지 않았지만 깨달음을 성취한 마음입니다. 이 때문에 작품에서 세간과 출세간의 비율을 얼마로 잡을지가 문제가 되는데, 저는 출세간의 비율을 70%, 세간의 비율을 30% 정도로 잡았습니다. 출세간의 비율이 더 높은 것은 당연합니다. 불교는 세간으로부터 출세간으로 나아가는 사상 체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출세간의 비율을 너무 높이면 세간 사람들이 읽게 되는 이 책이 독자에게 너무 먼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 때문에 제가 세간의 비율을 약간 높게 잡은 것입니다. 바꿔 말해서, 이 책에 고상한 인물들만이 나오면 독자는 자신과 너무나 다른 인물들에 대해 비현실적이라고 느끼거나 싫증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 책에 욱가따 장자의 이야기를 넣은 것, 그의 아들인 꼬꾸 같은 비열한 인간을 배치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같은 의미에서 재가 신자이지만 아라한(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한 성자)의 경지에 이른 사람을 배치했습니다(말리까 부인).

사. 남자와 여자의 조화

앞에서 말한 말리까 부인의 경우는 깨달음에 있어서는 승속(僧俗)의 차별과 함께 남녀의 차별 또한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같은 의미에서 저는 비구 승려를 대표하는 사리뿟따 마하테라와 함께 비구니 승려의 대표자로 웁빨라완나 마하테리를 배치하였고, 여자로서 아나함과를 성취하여 정거천에 난 다음 수많은 천왕 천인들 앞에 설법을 하고나서 앉은 자세로 반열반에 드는 아유타를 보임으로써 여성이 남성에 비해 조금도 뒤질 것이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아. 이상과 현실의 조화

본 작품에는 쾌락의 하늘 도리천을 배경으로 한다든가 수억 명의 천인이 등장한다든가 신통력으로 삼계에 빛을 보낸다든가 하는 환상적(환타지)인 요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학 예술적 장치, 또는 독자와의 무언의 합의에 의한 것이며, 본 작품이 이를 넘어 철학적 수행적인 부분― 즉 법(法, Dhamma)을 논하는 설법으로 들어서면 그 순간 내용은 지극히 현실적 사실적 실제적 구체적 경험적인 성격을 띕니다. 바꿔 말해서, 본 작품에서 논의되고 있는 불교 진리는 ‘믿음’의 진리가 아니라 ‘자명(自明) 자증(自證)’한 진리입니다(각주 ‘믿음/앎’ 과 ‘자명 자증’ 참조).

자. 문학 사조(思潮) 상의 여러 특성의 조화

문학 사조는 크게 보아 고전주의(古典主義)-낭만주의(浪漫主義)-사실주의(寫實主義, 현실주의, 리얼리즘)를 거쳐 후기 현실주의로 진전되어 온 바, 본 작품은 이들 모든 사조의 특성이 두루 원용되어 있습니다.

고전주의

본 작품은 고전주의의 특성인, 인간의 고귀함을 찬양하는 요소가 매우 많습니다. 자기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인간의 정신을 찬양하고, 마침내 그에 이르는(근접하는), 중세 천 년 동안 기독교의 신본주의(神本主義)에 의해 억압되어 온 고대 그리스의 인본주의(人本主義, 휴머니즘) 정신을 부활코자 하는 고전주의는 독일의 괴테에 의해 정점(頂點)을 이룬 바, 우리는 괴테 자신이 자신의 저작물 중 가장 사랑했던 작품인 〈헤르만과 도로테아〉를 통해 고전주의 문학의 성격 및 장점을 잘 감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 작품?는 〈헤르만과 도로테아〉에 나타난 것 같은, 또는 휠더린의 《히페리온》에 보이는 것 같은 고전주의 정신이 있습니다. 고전주의는 그 성격 상 주인공의 정신, 또는 품성이 고귀해야 합니다. 그 점에서 볼 때, 본 작품의 일곱 명의 주인공 중 붓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고귀한 품성을 가진 분이었고, 사리뿟따 또한 붓다에 준하는 분이었으며, 밧디야와 아유타 또한 성자의 경지에 이른다는 점, 빙기사는 미래의 붓다가 되기로 예정된다는 점에서 아마도 인류 문학사상 이렇듯 고귀한 인물상이 한 작품에 풍부히 나타나는 작품은 아직까지는 없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단테의 작품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또한, 본 작품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인 라자와 시리마 또한 고전주의의 주인공들처럼 고귀한 이상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낭만주의

본 작품에서 낭만주의적 요소는 주로 환타지(환상)를 통해 이용됩니다. 본 작품은 ‘프롤로그’에서부터 환상적인 요소가 쓰이고 있고,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도리천(그리고 환희동산)이 무대로 이용됨으로써 환상은 더욱더 깊어집니다. 아마도 본 작품에서처럼 하늘 세계를 직접적으로, 자세하게 무대로 삼은 소설은 아직까지 없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더하여, 본 작품에는 수억 명의 천인이 법회를 보고, 붓다가 온몸으로 물과 불을 뿜어내는 신통을 보이며, 웁빨라완나가 금강보좌를 만들어내고, 밧디야가 빙기사의 잃었던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등 환상적인 요소가 매우 많습니다. 이는 모두 실현 가능할 것같지 않은 인간의 원망(願望)을 자유로이 작품 속에 구현하는 낭만주의와 통하는 요소입니다. 또한, 본 작품에는 감탄과 감동을 나타내는 장면과 문장이 매우 많습니다. 예를 들어 본 작품에는 자주 “오오!”라는 감탄사가 나오고 있고, 지문에서도 작가가 감탄의 문장을 사용하는 예가 많은데, 이는 감정 미만(感情彌滿)의 특성이 있는, 또는 작가가 직접 지문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낭만주의와 통합니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주의와도 통하는데, 왜냐하면 고전주의는 인간이 이상을 향해 전진하는 특성이 있고,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는 남들로부터 “오오!” 유의 감탄을 듣게 마련(또는 자기 자신이 내적으로 그런 언어를 발하지 않을 수 없는 감동에 빠지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붓다의 우다나(Udana, 感興語: 마음에서 감흥이 우러나 스스로 노래한 시, 또는 그 시들의 모음), 예수의 ‘산상 설교’, 공자의 감탄어(《논어》 중 호[乎], 재[哉] , 즉 감탄사로 끝나는 문장) 등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이들 세 성인이 타자들의 감탄 감동을 유발하거나, 자신의 내면에서 감탄 감동이 일어나는 사례(경우)가 많았음을 의미합니다. 그에 비해 소크라테스에게서는 그런 요소가 세 성인보다 상대적으로 적고, 《맹자》 또한 《논어》에 비해서 그런 요소가 적으며, 《노자》도 그러합니다(《장자》에는 그런 요소가 많습니다. 이는 작가인 장자의 인격이 붓다 예수 공자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철학가인 한편으로 문학가, 즉 상상력이 이용되는 글을 썼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은 본 작품의 경우와 유사 상통합니다). 두 분 성자는 앞의 세 분 성자에 비해 타자에 대해 보다 공격적이고(그러나 부드러운 유머의 공격성, 특히 소크라테스의 경우. 유머는 풍자[諷刺]와 통하는 바, 풍자는 비유를 통해[諷] 남을 찌르는[공격하는, 刺] 것입니다), 그 공격성이 내적인 감탄 감동을 저해한 것이 아닌가 필자는 생각합니다(후주 ‘고락중도’ 중 자기 자족적[自己自足的]인 가치에 대한 설명을 참조할 것).

현실주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는 19세기 이래 현재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사실주의(사실주의, 리얼리즘)와 배타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현실주의의 입장에서 작품을 쓴다는 것은 고전주의가 실현이 불가능한 이상을 추구한다고 비판하는 것을, 낭만주의가 현실에는 없는 것을 묘사하는 유치한 수준의 문학이라고 비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본 작품에서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으면서도 현실주의적 요소가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본 작품은 진리[法, Dhamma]를 토론함에 있어 지극히 현실주의적(사실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합니다. 나아가, 주인공들의 마음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면에서 저는 본 작품에서 조금의 비현실성이나 비사실성이 없는 입장에 서고자 했습니다. 바꿔 말해서, 저는 문학 예술적인 효과를 위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받아들인 곳을 제한다면 본 작품이 모든 장면, 모든 문장, 모든 언어에서 단 한 장면, 단 한 문장, 단 한 단어도 거짓이 없기를 바랬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정직! 정직! 정직하기를, 한 장면, 한 장면이 성실! 성실! 성실하기를 저는 희망한 것입니다. 그것이 제 희망대로 실현되었는지 여부는 제가 판단할 사안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려고 노력했다는 것, 그런 자세를 견지하려고 했다는 것, 저의 마지막 한 방울 땀이 바쳐진 것이 바로 그 점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후기 현실주의

현대에 이르러 문학은 특정한 사조로 표현하기 어려운, 다양한 기법이 두루 사용되어 창작되고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환상(의식의 흐름)인지, 이 작품이 장르 작품인지 순수 문학 작품인지, 이것이 문학인지 철학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작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본 작품에도 그런 여러 특성이 두루 섞여 있습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본 작품의 철학성입니다. 제가 알기로 본 작품처럼 후주가 136 페이지가 붙은 소설은 세계 문학을 통틀어서도 아직까지는 없습니다(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 각주가 많이 붙어 있기는 합니다만, 제 책에도 각주는 456 개가 붙어 있습니다). 이 점에서 본 작품은 문학 작품인 한편으로 철학 작품으로 분류되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제가 재작년에 읽은, 《신곡》에 대한 이해를 더 깊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준 《단테 신곡 강의》의 저자인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단테는 문학가인 한편으로 사상가”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 말이, 제가 본 작품에서 보인 철학이 저를 ‘철학가(사상가)’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깊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입니다. 다만 그 깊이는 차치하고 본 작품에 그런 특성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뿐입니다.

차. 불교 사상(분위기)와 기독교 사상의 조화

본 작품이 불교를 기초로 하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본 작품에는 기독교 사상이 유입되어 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아라한의 길, 보살의 길’에 들어 있는, 신약성경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원용하여 기독교의 복음 사상과 불교의 보살 사상을 결합한 것과, 후주 ‘종교를 믿는다는 것’의 마지막에 제시되어 있는 도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서로 만나는 기독교와 불교의 사상 체계(섬의 비유)’입니다. 또한 저는 본 작품의 한 개 장, 즉 ‘그 항구 도시의 전설’ 장의 분위기를 기독교적인 것으로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예수(기독교) 사상에 대한 저의 애정을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로 하여금 새로운 글맛(분위기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카. 삼인칭 시점과 일인칭 시점의 조화

본 작품은 기본적으로는 삼인칭 전지적(全知的) 시점을 사용하고 있으나, 중간 중간에 일인칭 시점을 원용하였습니다. 이같은 시점 변경을 통해 독자는 글맛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특히 일인칭 고백체 시점을 사용함으로써 독자가 보다 더 소설이 묘사하는 현장, 또는 화자의 심정에 몰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6. 유기적인 조직

저는 본 작품이 단선적(單線的)인 것이 되지 않도록 유념했습니다. 사실 《신곡》 등이 위대한 작품이라는 점은 백 번, 천 번 말해도 부족할 정도이긴 하지만 작품이 단선적이라는 점만은 아쉽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작품에서 단테는 수많은 인물들을 보고 만나지만 지옥에서 만난 21번 인물(이해하기 쉽게 번호를 붙여보았습니다)과 천국에서 만난 58번 인물 간에는 ‘거의’ 연관성이 없습니다. 단테는 그냥 차례대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보고 만날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점을 고려하여(저의 작품 또한 이 점에서 매우 미미한 성과밖에는 거두지 못했음을 자인합니다만) 작중 인물, 또는 앞의 어떤 장면과 뒤에 나오는 어떤 장면, 앞에서 거론한 어떤 키워드와 뒤에서 나오는 같은 단어(개념)의 의미가 중첩 변화(심화)되어가도록 유념하였습니다. 그중 몇 가지를 들어보면

가. 프롤로그에서 빙기사는 “운명은 난자(亂刺)하라!”라는 시구(詩句)를 읊습니다. 이 시구에 쓰이고 있는 ‘운명’이라는 단어가 향후 빙기사에게 어떤 의미로 시작되어 어떤 의미로 마무리되는지를 추적해봄으로써 제가 이 말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이용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이에 대해 작가인 제가 다 ‘해설’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그것은 독자의 ‘자유로운 해석’을 제한하여, 제가 앞(5-가)에서 말한 ‘말하는 이가 의도하지 않았던 심상(心象)을 만들어냅니다’라는 예술적 효과를 방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의미에서 ‘낙원’, 또는 ‘천국’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에 유념해보면 좋습니다. 주인공인 빙기사는 전생에 담마딘나로서 자뚜를 구해준 다음 “저 먼 곳에 낙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 다음, 그와 그의 아내인 아사타의 낙원을 지켜주기 위해, 또는 낙원을 만들어주기 위해 분투합니다. 그런 끝에 자신은 낙원에서 멀어지고, 그런 끝에 “낙원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사타에게 있다고 말하지만 아사타와 하나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다가 금생으로 넘어와 밧디야(자뚜)와 아유타(아사타)가 낙원을 이루고 사는 곳에 다가가, 마치 에덴 동산에서 사탄이 그런 것처럼 아유타를 유혹하여 그들의 낙원을 파괴합니다(失樂園). 그런 끝에 아유타는 자신이 낙원에서 실낙원으로 추방당한 원인을 자기 자신(自業自得)에게서 찾은 끝에 불교에 귀의하여 깨달음을 이룸으로써 낙원을 되찾고(復樂園), 그 낙원을 타자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그에 비해 빙기사는 낙원에서 실낙원으로 추방당한 원인을 타자(운명)에게로 돌립니다. 그런 끝에 타자 중 가장 강력한 타자인 절대신 후루와 안에서 낙원(천국)을 찾지만 그의 시도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종교 전쟁이라는 형태로 변질되어 실현됩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그는 아유타를 찾아 인도 전역을 떠돌고, 그런 끝에 어둠의 길에서 벗어나 밝은 길로 들어섭니다. 그가 그렇게 운명을 원망하는 마음을 버리고 모든 것이 자기 탓이라는 쪽으로 생각을 돌리는 사이 사리뿟따 마하테라는 낙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법합니다. 사리뿟따 마하테라는 불교의 낙원은 ‘여기(인간계)’에 있는 것이지 ‘저기(기독교가 말하는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지금’에 있는 것이지 ‘미래(기독교가 말하는 소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하는 것입니다. 또한 붓다는 빙기사에게 기(記)를 주기 전에 숩바라까 시민들들에게 운명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법합니다. 이를 전제로 어두운 세계(남을 탓하는 마음)로부터 밝은 세계(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로 돌아선 빙기사는 마침내 붓다로부터 “그대는 장차 부처가 되리라!”라는 선언을 듣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그때 빙기사가 꿈꾸는 낙원, 즉 ‘나의 불국토는’ 미래에 있습니다. 이렇게 그는 “‘지금-여기의 낙원으로의 불국토’를 ‘미래-그곳’에 설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낙원, 또는 천국은 이렇듯 처음에는 미래-저곳에 설정되었다고 지금-여기로 다가오고, 그것은 다시 미래-저곳으로 설정되는 순환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세 주인공은 서로로 엇갈린 상태에서 상대방(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리고 금생에서도 빙기사는 아유타를 찾아다니는데, 이 찾아다님 또한 그 배경은 지금-이곳, 미래-저곳과 관련이 있습니다. 또한 밧디야에게도 찾아다님이 있는데, 다만 그는 어떤 사람을 찾아다니지 않고 진리를 찾아 떠난 끝에 깨달음을 성취하며, 후반부의 아유타와 빙기사 또한 그러합니다. 나아가, 이야기를 끌어가는 라자와 시리마 또한 전생과 금생에서 처음에는 붓다를, 그 다음에는 말루카와 밧디야와 사리뿟따를 찾아가는데, 이들 모든 주인공들의 찾아감(찾아다님)은 곧 구도(求道)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해 이미 깨달음을 성취한 붓다가 빙기사를 찾아감, 사리뿟따 마하테라가 다른 비구들 및 빙기사를 찾아감은 전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다. 같은 의미에서 ‘개별자’ 개념 또한 여러 곳에 의미가 변주(變奏)되어 있습니다. 라자와 시리마가 마지막에 개별자로서 각각 다른 길을 가겠다는 장면, 아사타가, 팔 하나가 잘려진 담마딘나가 펄떡펄떡 뛰어오르며 고통스러워할 때 그의 고통을 대신해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던 장면, 그 대신 담마딘나의 하나뿐인 손을 끌어와 자신의 가슴을 만지도록 한 장면, 그러나 거기까지뿐 끝내 몸을 허락하지는 않은 것 등입니다.

라. 저는 몇 가지 단어(이미지)들을 위와 같은 방식으로 사용했습니다. 이중 가장 중요한 것은 ‘태양(해)’입니다. 본 작품은 ‘태양족의 후예 붓다’라는 단어에서 시작되어 ‘태양족의 후예 붓다’가 ‘바다의 종족인 숩바라까족에게 설법하러’ 가는 것으로써 끝납니다. 누구나 아는 것처럼 빛(태양)과 물(바다)은 생명이 생존하기(탄생하기) 위한 기본 조건입니다. 또한 저는 마지막에 붓다로 하여금 붓다의 모든 교설을 총합하는 게송을 읊도록 했는데, 그들 게송들 중 후반부 두 편은 제가 창작한 것입니다(앞의 것들도 많이 고쳐서 새로 썼습니다). 그리고 그 게송의 마지막의 ‘해가 되어 빛나라!’로 되어 있고, 그 이전에 붓다가 등장할 때 숩바라까의 뒷골목 사람들은 ‘해가 들었다!’고 외칠 때의 느낌을 받습니다. 또한 붓다는 빙기사에게 수기하기 전에 해에 대한 비유와 물에 대한 비유를, 즉 앞에서 말한 생명의 기본 조건을 통해 빙기사의 능력을 시험합니다.

마. 저는 일부러 처음의 시작 행과 마지막 행의 중심 단어를 ‘붓다’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처음의 붓다는 술어를 be 동사인 “붓다가 세상에 ‘있던’ 때”로 받도록 하고, 마지막 문장은 자동사인 “걸어갔다”로 받도록 하였습니다. 이는 정적(靜的)인 붓다에서 시작되어 동적(動的)인 붓다로 끝남을 의미합니다.

바. 저는 ‘현재의 붓다’가 마지막에 “걸어갔다”로 하였듯이 ‘미래의 붓다’인 빙기사 또한 그가 처음 등장하는 ‘프롤로그’의 마지막 문장을 “걸어갔다”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붓다가 걸어간 것과 빙기?가 걸어간 것은 의미가 다릅니다. 전자는 진리의 완성자로서 ‘걷되 걷지 않음’으로써 걷는(‘허공을 나는 새처럼’ 걷는) 것이고, 후자는 진리의 추구자로서 걷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빙기사가 기를 받는 장(‘그대는 장차 부처가 되리라’ 장)의 마지막을 ‘의지(意志)’라는 단어로 끝마쳤습니다. 이 단어에 대해서는 본문 중에 ‘성자에게는 의지가 없다’는 내용이 설법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자에게 그러할 뿐 빙기사는 아직 중생이므로 선의지(善意志)를 내어야만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 저는 ‘작가의 말’을 씀에 있어서도 첫 단어를 ‘경(經)’으로 시작하여 끝 단어를 ‘마음’으로 마쳤습니다. 이는 ‘불교는 곧 마음의 법’이라는 사상을 반영한 것입니다.

아. 저의 이 책에서 ‘개별자’ 개념은 매우 중요합 니다. 그리고 불제자의 길이 ‘아라한의 길’과 ‘보살의 길’로 나뉘며, 사람은 개별자로서 이중 어느 편도 선택할 수 있는데, 이 점에서 이야기를 처음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인 라자와 시리마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자신들이 서로 사랑하지만 각기 다른 길을 걷겠노라고 말함으로써 제가 중요시하는 개별자 및 아라한의 길과 보살의 길을 명료하게 드러내었습니다.

자. 이상 여러 가지 점으로 본 작품이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있다는 점을 말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구성의 면에서의 유기성입니다. 그 점에서 본 작품은 신(信: 믿음)→ -해(解: 이해)→ 행(行: 수행, 실천)→ 증(證: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불교 교리에 맞추어 제1부를 ‘진실을 향하여→ 신법경(信法經)’으로 삼았고, 제1부에서는 ‘해’와 ‘행’을 거쳐 ‘증’에도달하는 단계까지로 잡아 마지막 장을 ‘깨달음’의 장으로 하여 주인공 중 한 사람인 밧디야가 사성제를 깨닫는 ‘네 진리-견법경(見法經)’으로 하였고, 제3부에서는 율(律) 경(經) 논(論) 등 삼장(三藏)으로 되어 있음에 맞추어 ‘법의 장수[法將]’ 사리뿟따 마하테라가 법을 논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지혜는 금강처럼-논법경(論法經)’으로 하였고, 제4부에서는 불교가 아닌 여러 사상들을 수렴하여 모든 사상을 대교향악처럼 조화시키는 한편, 이를 서사적으로 화려하게[華)] 조화시키면서 ‘대교향악-화법경(和法經)’으로 하였습니다.

7. 풍부한 비유와 상징

문학이 언어를 제2차적으로 사용한다는 것 중의 대부분은 곧 비유입니다. 이때의 비유에는 상징도 포함이 됩니다만, 그 점에서 저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비유, 또는 상징은 역시 인간의 감각 기관 중 가장 중요한 눈[眼]과 귀[耳]를 이용한 비유(상징)입니다. 두 감각기관 중 눈의 상징은 빙기사를 통해, 귀의 상징은 아유타를 통해 구현되어 있습니다.

가. 아유타의 경우, 그녀는 정직에만 귀 기울이던 귀를 전생의 업력에 휘말려 잠시 빙기사에게로 향한 결과 자신의 남편이자, 자신을 신처럼 믿어주던 밧디야를 실망시킵니다. 그 결과 두 귀의 청력을 잃게 되는데, 그녀는 그것을 자신의 내면을 주시하는 기회로 전환한 끝에 깨달음을 성취하고 청력을 회복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그녀는 타자의 아픔에 귀 기울이는 일생을 살다가 다시 청력을 잃게 되는데, 그때 그녀가 들어간 상태는 처음에 청력을 잃었던 상태가 아니라 불교의 지극한 경지로서의 상태, 즉 선정, 또는 열반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녀는 정거천인으로서 밧디야(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 모든 사람들의 귀에 지고한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노래(시)를 부르고, 서사(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그런 끝에 그녀는 시를 읊고나서 전생에 두 번 들었던 것 같은, 그러나 그보다 훨씬 지고한 정적, 즉 반열반을 실현합니다. 그러자 한때 그녀의 귀를 멀게 했던 밧디야가 다가가 그녀의 귀를 어루만지고, 그 순간 그녀는 재가 되어 스러져버립니다.

나. 한편 빙기사는 오른쪽 눈을 잃게 되는데, 오른쪽 눈은 본 작품 ‘보살과 두 아들의 비유’에서의 큰아들에 해당되는, 즉 불교의 두 눈인 ‘지혜’와 ‘자비’ 중 지혜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빙기사는 처음 지혜, 즉 자아없음의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아유타에게 집착(사랑)했고, 그 결과 남(밧디야)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오른쪽 심안처럼 오른쪽 육안을 잃습니다. 그런 다음 많은 고난의 시기를 거쳐 아유타의 간접적인 가르침을 통해 오른쪽 심안을 뜨고, 붓다로부터 기를 받은 다음에는 자신의 육안을 멀게 한 밧디야가 그의 육안을 다시 띄워줍니다.

빙기사는 왼편 눈만의 시력을 갖고 있는데, 저의 작품에서 그 눈은 자비(사랑, 예술, 슬픔)의 눈, 즉 ‘물[水]의 눈’입니다. 자비는 물론 고귀합니다. 그러나 지혜가 없는 자비는 자칫 ‘거룩한 악’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가 역사를 통해 뼈아프게 겪은 일로서, 가장 대표적인 거룩한 악이 행해진 것은 십자군 전쟁입니다. 또한 최근의 9. 11 사태 또한 거?한 악으로서 행해진 것인데, 아직까지 문학이 이 중요한 주제를 다루어 결정적으로 성공한 사례는 매우 드뭅니다(이 주제는 저의 젊은 시절의 화두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가운데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작품 《악령》에서 이념이라는 고귀한 목표를 가진 끝에 마침내는 살인을 교사(敎唆)하기에 이르는 인물을 그렸고, 그것이 이 주제를 잘 다룬 사례에 해당될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토록 철저하게 이념을 비판한 작가가 도달한 결론이 러시아 정교(또는 그만의 특이한 기독교)라는 또다른 이념이라는 점입니다(이념은 필자가 후주에 설명한 ‘산냐’로서 결코 진리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 비록 성경에 근거한 것일지라도. 불경에 근거한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작가가 도달한 그 결론― 인간 지성(이성)의 한계를 절감한 끝에(《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이반) 신적 지성(神的知性, 啓示知識=성경) 앞에 자신을 바쳐야 한다는 결론(《죄와 벌》의 소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조시마 장로와 알료샤)은 유형 생활의 고통을 성경으로 위로받은 작가로서는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작가가 도달한 결론을 끝까지 밀어부칠 경우, 바로 거기에서 거룩한 악이 탄생할 수도 있음을 역사가 여실히 보여주었으므로(십자군 전쟁, 마녀 재판, 청교도들의 인디안 학살 등), 위대한 작가 도스토예프스키 또한 불교 사상 앞에서는, 적어도 ‘산냐(이념)’와 관련된 면에서만은(그 면을 제하면 분명 그는 위대하고도 위대한 작가입니다!) 대단한 작가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저의 작품은 그 점에서 빙기사가 산냐를 산냐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종교 전쟁을 일으켜 거룩한 악을 저지르고 있고, 마침내는 사랑하는 여인인 아유타를 통해 그 어리석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끝에 지혜를 얻게 되어 장차 부처가 되는 보살의 지위에 오르고, 그 순간 자신의 육안을 찌른 밧디야가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 줍니다.

눈은 감각기관 중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모든 감각기관을 대표하고, 나아가 마음까지도 눈의 비유로써 흔히 말해집니다. 우리 말의 경우에도 들어보다. 냄새맡아보다, 맛보다, 감촉해보다 등 눈을 제한 나머지 감각기관의 능력에 대해 각각 ‘보다’를 붙여 말할 수 있는 것이 그 한 사례입니다. 이 중요한 보는 눈을 저는 매우 심도있게 상징화하고 했는데, 그것이 잘 되었는지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라 하겠습니다(제가 도스토예프스키의 한계를 지적한 것처럼 누가 저의 한계를 지적해주시기 바랍니다).

다. 이밖에도 본 작품에서 비유가 사용되는 예는 매우 많습니다. 특히 제가 불교 교리를 독자에게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개발한 비유들― 시소의 비유, 섬의 비유, 독(毒)과 향기의 비유, 컵을 채우는 물의 길과 컵의 길의 비유들은(그밖에도 매우 많습니다) 전적으로 저만의 독창적인 것들입니다.

8. 형상화(形象化)

예술은 곧 ‘형상화’이고, 형상화의 요점은 ‘마음에 그림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본 작품에서 서사의 주요 장면이 독자의 머리에 보다 선명하고, 상징적이고, 다채롭고, 아름답게 떠오르도록 유념했습니다. 그 점은 본 작품을 읽으신 다음 되돌아보면 누구나 느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점에서만은 그동안 있어온 수많은 문학 작품들과 비교해서 저의 작품이 결코 뒤지지 않으리라고 자부합니다. 바꿔 말해서, 제 작품을 읽는 동안 독자는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것입니다.

9. 영화(연극) 기법의 활용

앞의 항목에서 말한 것처럼 저는 본 작품을 영화의 장면처럼 구성하고, 또 표현했습니다. 그것은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 작가가 그렇게 한 것이기도 하고, 본 작품에 나오는 주요 주인공들인 밧디야(자뚜) 아유타(아사타) 빙기사(담마딘나)의 성격이 결단력이 강하고 대담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영화 기법과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클라이막스 부분을 맨앞에 보인 다음 타이틀 롤이 나오고, 그 다음에 서사의 맨처음이 시작되는, 흔히 쓰이는 영화 기법을 원용하여 맨 앞 프롤로그에서 가장 중요한 빙기사를 직접, 또다른 주인공인 아유타를 간접적으로 소개한 장면입니다. 제가 이렇게 한 것은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본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빙기사가 후반부에 나오기 때문에 먼저 주인공을 독자에게 소개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독자가 ‘이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구나!’하고 알게 하기 위해서. 또한 빙기사가 아유타를 거론함으로써 아유타 또한 중요한 사람이구나, 하고 알게 하기 위해서).

10. 주인공의 다면적 묘사

본 작품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은 모두 일곱 사람입니다.

(1) 붓다
(2) 사리뿟따
(3) 라자
(4) 시리마
(5) 밧디야
(6) 아유타
(7) 빙기사

이중 붓다와 사리뿟따는 실제 인물이므로 작가의 창작 영역에서 제외되고(그러나 실제의 두 분과 작품 속의 두 분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즉, 작품 속의 두 분은 작가에 의해 실제와 상당히 달라져 있습니다. 붓다의 경우에는 마지막 장면에서 “오라, 와서 여래의 벗이 되라!”라고 말하는 등 근엄한 붓다가 아닌 ‘친구로서 다가오는 붓다’ , 즉 보다 친근한 붓다로 바뀌어 있는 점이 있고, 사리뿟따의 경우에는 경전에는 없는 수많은 설법을 펼칩니다). 한편 라자 이하 다섯 주인공은 작가가 온전히 창작한 인물들인데, 이중 라자와 시리마는 중간 근기(根機: 자질과 성격)의 인물들이고, 뒤의 세 명은 아라한이 되거나, 붓다가 될 예정인 매우 높은 근기의 인물들입니다. 그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장차 부처가 될 빙기사이며, 이들 세 인물은 각기 다른 주인공들에 의해 간접적으로 묘사됩니다. 즉, 처음에는 밧디야가 아유타와 빙기사를 말하고, 나중에는 아유타가 밧디야와 빙기사를 말하며, 마지막으로는 빙기사가 아유타와 밧디야를 말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똑같은 사건이 각기 다른 빛깔로 독자에게 느껴지게 되었는 바, 이밖에도 이들 세 사람은 붓다와 추추 범천 등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간접으로 묘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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