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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 -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전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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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상품명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 -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전북편
판매가 22,000원
저자/출판사 이지누/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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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수 343
발행일 2012-08-07
ISBN 9788994963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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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 -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전남편

    19,800원

책소개

고요한 전라북도의 절터에서 스스로의 참모습과 마주치다

전라북도의 절터 여덟 곳을 답사한 기록이다. 모두 여덟 권으로 기획된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의 두 번째 권으로, 앞으로 이 시리즈는 충청, 경기, 경주, 강원, 경남, 경북 편으로 차례차례 이어질 것이다. 전라북도의 폐사지 답사는 남원 만복사터에서 시작해, 남원 개령암터와 호성암터, 완주 경복사터와 보광사터, 고창 동불암터, 그리고 부안 불사의방터와 원효굴터로 이어진다. 저자는 때로는 시적인 감상으로, 때로는 설화와 전설과 민담으로, 때로는 불교와 관련된 역사적 사료로 절터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 또한 현장의 느낌을 실감나게 전달함으로써 독서의 흥취를 더한다. 이를 통해 보통 관광객의 눈으로는 식별되지 않는 전라북도 절터의 진면목을 순례자의 맑은 눈으로 또렷하게 부각시킨다.

책 속으로

1장 남원 만복사터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는 소름이 돋아나도록 슬픈 이야기다. … 비록 천도재를 올려주지는 못할망정 눈부시도록 희어서 가슴 시린 육수장삼 늘어뜨리고 탐스러운 모란꽃 한 송이 손에 든 채 나비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그저 마음뿐이다. 사뿐사뿐, 굳게 박혀 있는 주춧돌을 밟으면 세월을 거슬러 그들에게로 갈 수 있을까. 아니면 높이가 서른다섯 자나 되었다는 구리로 만든 부처가 앉았던 대좌 위로 올라가서 바라춤이라도 추면 그들에게로 갈 수 있을까. 만복사 절터가 그들의 원당이라도 된 듯, 내 속에서 그들을 위한 해원 몸짓이 아련히 움텄다. 하지만 절터에 드리운 달빛은 습했다. 육수장삼의 잠자리 날개 같은 장삼 자락이 축축하게 젖어 펼치지도 못할 만큼 말이다.---pp.25~26

사실 돌에 새겨놓은 마애불이거나 석불이거나 간에 눈길 주지 않은 곳 없이 나라 안을 쏘다녔다. 그렇지만 이처럼 유려하고 섬세한 선으로 베풀어놓은 부처님을 본 적이 없다. 더구나 선이 베풀어져 있는 바위의 면조차 고운 손으로 매만져놓은 비단이나 매끈한 화선지와도 같이 다듬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손가락, 발가락, 가사의 주름과 매듭의 표현이 돋보이며, 코에서 입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조금 마멸되기는 했지만 상호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곳 나무랄 데 없이 가는 선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찬탄을 흘릴 수밖에 없다. 그 정병을 들고 있는 모습이 미륵불이든 관음보살이든 존명에도 개의치 않았다. 다만 거의 완벽하게 남아서 지금 이 순간까지 내 앞에 펼쳐져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격하고 찬탄을 그치지 못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존재는 유감없으며, 내가 살아가는 당대에 그러한 것들과 마주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나의 삶은 아름답지 않은가---pp.53~55

2장 남원 개령암터
어느 날부터는 이곳에 부처님을 뵈러 오는 것이 아니라 말을 멈추러 오곤 했다. 그러나 나는 정녕 몰랐다. 말을 멈추려면 생각부터 그쳐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대뜸 말은 멈췄지만, 그것은 단지 말할 상대가 없는 것일 뿐 나 스스로 말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말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일 뿐 말은 내 속에서 풍선처럼 커지고 있었다. 그렇게 웃자란 말들은 산에서 내려오는 날부터 마치 종기처럼 흉측한 모습을 하고 겉으로 돋아났으니, 그 무슨 꼴불견이었을까. 그렇게 진세를 떠돌다 다시 이곳으로 향하기를 예닐곱 차례, 그때서야 깨달았다. 말을 그친다는 것은 곧 남을 향한 것은 거두지만 나를 향한 것은 더욱 넓고 깊게 펼쳐야 하며, 내 속에서 생각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삭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pp.90~91

모든 것을 깊이 참구해 급히 깨달으라고 했거늘, 스스로를 깊이 참구하기에 고요함보다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고요할 때에는 고요함도 모르고, 또한 고요하지 않음도 모르는 법이다. 움직임에 다다르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 전의 고요함을 아는 것 아니겠는가. 진세에 머물지 않았다면 이 고요함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지 못했을 터이니, 아! 나에게 이곳에서 맞닥뜨리는 고요는 참으로 넓고 깊은 선물이자 아름다운 것이다.---p.91

3장 남원 호성암터
그러나 그동안 사람의 발길이 잦았기 때문인지 지금은 길도 선연하고 이정표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오늘은 그냥 길을 잃고 싶었다. 미필적 고의인들 어떠랴.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는 물론 메마른 낙엽이 단단한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투명하기만 한데 말이다. 동살 비쳐들기 시작한 숲에 낙엽은 여우비처럼 흩어지고, 그것이 바위만이 아니라 간혹 내 머리나 어깨 위에도 툭툭 떨어졌다. 그때마다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기 일쑤였지만 그래도 박치에 음치인 것조차 잊고 흥얼흥얼 콧노래가 나오는 것은 의외였다. 마치 시조를 읊조리듯이, 속도 느린 랩을 하듯이 흥얼거린 것은 신라 경덕왕 19년인 760년 4월에 월명사가 지은 향가 〈도솔가〉였다.---p.123

굵은 바람이 한줄기 지나가자 뒤이어 낙엽들이 마애미륵을 장엄하며 흩날렸다. 햇살은 반짝이며 떨어져내리는 낙엽들을 찬란하게 비추었고, 아직 정오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암자터는 짙은 그늘에 싸이기 시작했다. 바람 거칠고 낙엽이 융단처럼 깔린 암자터에 향을 밝히기는 마뜩치 않았다. 뜻밖에 절터에서 만난 빛 고운 감나뭇잎 두어 장을 주워서 바위 아래 샘 속에 넣어드리는 것으로 공양을 대신하고, 암자터 가득 내려앉은 낙엽들을 발로 헤집으며 한참을 서성였다. 그렇게 하면 고요하게 가라앉은 마른 잎들의 향기가 깨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부처님 앞에 바치는 향공양이 될까마는 내가 드릴 수 있는 가장 큰 마음이었다.---p.137

4장 완주 경복사터
아! 어쩌란 말이냐. 이번에는 눈앞에 산상 화원이 펼쳐졌다. 조팝꽃이다. 그들은 내가 가려는 길에 마중이라도 나온 양 푸지게 피었다. 꽃을 찾아 덤불을 피해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꽃을 피해서 걷기도 힘들 지경으로 들판은 꽃 천지다. 아름답다. 부드러운 바람에도 산벚꽃은 찬란한 꽃비를 뿌리고, 먼 곳에 핀 선홍빛 진달래의 유혹에 넘어가 그에게로 가려 하면 허리춤은 조팝꽃이 붙잡고 발목은 갖은 들꽃들이 잡아챘다. 땅바닥에는 밤새 꽃비라도 쏟아진 양 온갖 꽃들이 깔려 있었으니, 어찌 지르밟을 것인가. 차마 발길 옮기기가 조심스럽다. 마치 내가 천상의 화원을 거니는 신선이라도 된 것만 같았으니 이토록 이름다운 봄날, 어찌 마음이 들뜨지 않을까.---pp.153~157

내려오던 걸음 멈추고 숙연한 마음이 되어 흔들리는 꽃들을 바라봤다. 모든 소리 그친 곳, 꽃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소리만 들렸다.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으려니 나의 생각이 짧았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성사 보덕화상, 그는 떠난 것도 돌아온 것도 아니다. 그저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다. 그는 비래당, 그 자리에서 존재 그 자체로서 실유불성과 천제성불의 법문을 내놓고 있었던 것이다. 풀과 꽃은 피고 지고, 그때마다 보덕화상의 법문은 새로 피어난 꽃들을 모아놓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다만 우리들이 그를 찾지 않은 것일 뿐. 이제 나는 꽃들과 함께 보덕화상의 산중 법문을 들었으니, 그다음은 누구의 몫인가. 존재한다는 것, 참 아름다운 것이다.---p.176

5장 완주 보광사터
그때였다. 누석단 뒤 깊숙한 집에서 젊은 아낙이 쟁반에 과일을 가득 담고 향합과 함께 마지를 들고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물어도 말을 아끼던 그이는 원래 할머니가 하던 일인데 오늘은 자기가 들고 나왔다며 매일 그렇게 공양을 올린다고 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집안의 평안을 비는 것일 뿐 다른 뜻은 없다며 쏜살같이 집으로 들어가버린다. 굳이 따라가서 성가시게 굴지는 않았다. 이렇듯 향화 끊어진 절터에 무엇인가를 모셔놓고 공양을 올리며 자신들의 기원을 비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또 제각각 자신들만의 사연이 있을 터, 구태여 그것을 캐물을 까닭이 없다. 오히려 내가 방해가 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p.197

자리를 펴서 따스한 봄볕을 등지고 앉았다. 그러나 금세 후회하고 말았다. 차라리 볕을 등지지 말 것을, 어깨에 내려앉는 봄볕의 무게는 견디기 힘들 만큼 무거웠다. 잠시만 앉아 있어도 새벽부터 나대느라 지친 육신은 그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등이 무거운가 싶더니 이내 스르르 눈이 감겨버리고 말았다. 눈꺼풀의 무게 또한 감당하기 버거운 것이어서 그저 모른 체하고 꾸벅거리다가 아예 잠이 든 것이다. 아! 어디에서 이런 사치를 누려볼까. 꽃그늘에 앉아 갖은 향기에 몸을 내맡긴 채 잠들 수 있다니. 퍼뜩 놀라 눈을 뜨니, 워낙 곤하게 잠이 들었던 것인지 억겁의 시간이 흐른 것만 같았다. 게으른 기지개를 양껏 켜고는 책을 펼쳤다.---p.198

6장 고창 동불암터
이른 새벽이어서인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귀를 닫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눈을 잠시 감으면 귀가 더 크게 열려 소리가 들리곤 했다. 옅은 바람 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와 같은 작은 소리들이 말이다. 동살이 마애불에 비쳐들고 난 후, 한 시간여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소리만 듣고 앉아 있었다. 먼 곳으로부터 소리가 다가오면 숲이 흔들렸다. 그날은 또 그것만 보고 듣다가 돌아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동살 비치는 새벽의 소리는 이른 아침의 소리보다 섬세하고, 이른 아침의 색은 해가 중천에 솟았을 때보다 풍부한 법이다. 어느 때는 바위에 기대어 앉자마자 빛깔 좋은 나뭇잎에 매달려 있던 새소리가 달려들고, 햇볕이 칠송대 큰 바위를 뒤덮기도 했다. 그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다.---p.224

어느덧 해는 중천에 떠올랐고 나무 한 그루 없는 바위 위에서 꼼짝 않고 버티기란 여간 힘겹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아래로 내려가지는 않았다. 마애불 앞 동불암이 있었다는 곳은 발굴조사가 끝난 후 매끈하게 메워져버려 마뜩찮았고, 그곳에서 마애불을 올려다보는 것보다는 비록 마애불은 잘 보이지 않더라도 오히려 높은 곳에서 칠송대와 내원궁 그리고 마애불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것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바람마저 거칠게 불어대니 몸을 감출 곳도 필요했다. 천마봉으로 기신기신 오르다가 양지바른 곳을 찾아 웅크리고 앉았다. 그러곤 떠올렸다. 오늘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참A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러나 미혹에 젖은 순례자는 산을 내려온 지금까지도 미처 모른다. 용화삼회에 참가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스스로를 반성하고 몸과 마음을 맑게 해야 하는지 말이다.---p.244

7장 부안 불사의방터
두리번거리며 찾은 끝에 이윽고 불사의방이 보이는 바위 능선에 올라섰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아!’ 하는 경탄의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아니 나는 그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을 뿐, 그곳으로 무엇이 흘러나왔는지조차 알지 못하겠다. 모든 것이 붉었다. 먼 하늘로부터 발아래의 숲까지 그리고 아득한 산으로부터 코앞 불사의방터의 바위 벽까지, 어느 것 하나 붉지 않은 것이 없다. 만화경과도 같이 천변만화하는 장면 속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지나가면 가을 깊은 숲은 금세 불길이라도 피어올릴 것만 같은 마찰음을 쏟아냈으며, 그 모습은 현기증이 날 만큼 아름다웠다. 온 산하를 물들인 붉은색은 진하지도 그렇다고 옅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부드럽기만 했다. 겨우 마음을 추슬러 몇 장의 사진을 찍고는 넓고 편평한 치색바위를 포단으로 삼고 무변광대한 허공을 벽으로 삼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나 동살은 강렬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눈을 간질이는 안화가 너무나 어지러워 곧 비껴 앉아야 할 정도였다.---pp.253~256

서너 해쯤 뒤의 봄, 다시 새벽에 헐떡이는 숨을 참으며 고운 분홍빛 철쭉꽃이 떨어진 산길을 걸었다. 해가 뜰 무렵 다다른 불사의방은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에서 벗어나자 온통 하얀 물감이라도 뿌려놓은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만 살아 있는 듯, 안개를 헤쳤다가 다시 모으고 나를 뒤덮었다간 다시 흩뜨리기를 되풀이했다. 몸이 축축하게 젖도록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사는 동안 안개 낀 새벽에 이처럼 산마루에 홀로 앉아 있을 기회가 몇 차례나 올까. 안 그래도 고요한 새벽이 축축한 습기에 젖어 가라앉았으니 더욱 고요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그깟 사진이 무슨 소용이며, 제까짓 시 한 편, 글 한 줄이 어떻게 이 순간을 노래할 수 있단 말인가. 몸짓으로도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하는데 말이다. 양팔을 벌리고 춤을 출까, 아니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돌부처가 될까? 천지간이 고요한데 내 마음만 들끓었다.---p.274

8장 부안 원효굴터
잠시 눈을 감고 선정에 들었다가 비박용 텐트를 펼치고 침낭을 깔았다. 그러나 앉지도 또 눕지도 못했다. 그저 주위를 서성이며 망연히 허공을 바라보다가 짙은 어둠에 쌓인 숲 속만 바라봤다. 쇠로 만들어 놓은 난간까지 가서는 들판에 가물거리는 불빛 몇 개를 찾아보고는 돌아오고, 다시 굴속을 한 바퀴 도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또다시 쳇바퀴 돌듯, 그 일을 되풀이할 뿐이다. 무엇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두려움이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저 노자가 말한 위무위 뿐이다. 진세를 떠나 다다른 곳에서 어둠 속에 나를 방치하고 아무것도 구하지 않으며 무심하게 거닌 것이다. 구한다는 것은 얻으려는 것과 같다. 얻기 위해서는 행위가 있어야 하며, 행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알게 모르게 나를 치장해야 하지 않던가. 자정이 넘은 시간, 어둠이 짙을 뿐 아니라 바람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원효굴에서 그 무엇을 꾸며야 할까. 오히려 사람들 앞에서 벗어버리지 못한 가면과도 같은 나의 허상을 벗어놓고 실상의 나 자신을 낱낱이 들여다보는 것이 더욱 옳지 않겠는가.---p.292

태양과 달 그리고 별을 생각해보라.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음은 그들이 제자리를 지키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금씩 어긋나 비와 눈이 줄어들거나 넘치면, 우리는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그때마다 생각하고 발원하지 않는가. 그들이 제자리를 지키며 원만하게 우리를 보살펴 편안히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말이다. 우주가 그러하니, 자연 또한 마찬가지다. 또 자연이 그렇듯, 사람 또한 마찬가지여야 하는 것이다. 부처의 삶을 이루고자 했으면 그에 걸맞은 자리에서 추구해야 하는 법이다. 우주와 자연이 제자리에서 벗어나면 큰일들이 벌어지듯이 사람의 자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벗어나면 문제가 불거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수월해 보일 것 같지만, 오히려 어마어마한 힘이 요구된다. 별것 아닌 하찮은 일 같아도 그것은 근기없이는 지켜내기가 힘들다. 그렇기에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비록 우직해 뭉툭할지라도, 사실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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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이지누
한국 문화를 섬세한 눈으로 톺아보며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80년대 후반, 구산선문 답사를 하며 불교문화를 익히기 시작했으며, 1992년에 발간된 《나말여초의 선종사상사 연구》(이론과 실천, 추만호)에 사진작업을 했다. 그리고 퇴옹 성철스님 다비식을 시작으로 지금껏 큰 스님들의 다비식을 기록해 오고 있다. 2001년에는 한국 문화를 깊이 있게 다룬 계간지인 《디새집》(열림원)의 편집인으로써 창간을 주도했다. 그 후 〈불교신문〉의 논설위원을 지냈으며, 지금은 나라 안 폐사지에 대한 기록은 물론 동아시아 전반에 걸쳐 산재한 마애불의 기록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불교문화 외에 민통선 지역이나 비무장지대 그리고 한강에 대한 인문학적인 조사와 사진기록을 하고 있으며, 이 땅의 순정한 민초들에 대한 작업도 이어 오고 있다. 그동안 펴낸 책으로는 《우연히 만나 새로 사귄 풍경》(샘터),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호미), 《잃어버린 풍경 1.2》(호미), 《이지누의 집 이야기》(삼인), 《관독일기》(호미) 들이 있다.


목차

1장 남원 만복사터∥세상을 피하기 위한 대장부의 삭발|봄날 피어난 하얀 배꽃 같은 사랑|관을 쓰기도, 선을 배우기도 원치 않네|독특한 석인상과 이순자장승|옛 절은 그대로인데 중은 간데없고|아! 이것이 불화인가, 조각인가|이사 온 마애불과 부처 무서워 도망친 이무기|⊙ 만복사터와 용담사터

2장 남원 개령암터∥사냥꾼 할아버지와 정 장군|아름답다, 이 말씀이여!|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불상|암자터엔 주춧돌조차 없네|⊙ 지리산 개령암터
3장 남원 호성암터∥은둔하고 있는 이것은 불상인가, 여신인가|도환스님 만든 종이꽃이 바위에 핀 것인가|피었네, 피었네, 용화수꽃 피었네|때때로 마을 무당이 불을 밝히네|⊙ 노적봉 호성암터

4장 완주 경복사터∥비루한 몸이 천상의 화원을 거닐다|하늘을 날아서 온 보덕화상의 방장|유, 불, 도는 마치 솥의 세 발과 같다더니|원효와 의상도 보덕에게 배우다|축도생과 보덕의 돌과 꽃에 대한 산중 설법|떠난 것도 돌아온 것도 아닌 보덕화상|⊙ 고덕산 경복사터

5장 완주 보광사터∥타블로와 목판화 그리고 컴퓨터그래픽|경주까지 불빛이 비쳤다는 석등|쓰러진 석등에 민간신앙이 꽃으로 피다|오리인가, 제비인가 아니면 기러기인가|강진 만덕산과 문경 사불산의 백련사|도화꽃 그늘에서 만난 보우대사|⊙ 진구사터와 보광사터

6장 고창 동불암터∥새벽의 맑은 새소리와 부처님의 법어|검단선사가 새겼다는 마애미륵과 공중누각|도솔산 전체가 참회도량이네|부처님 가슴의 감실에 들어 있던 비결|⊙ 선운산 동불암터

7장 부안 불사의방터∥달은 저물고 해는 떠오르지 않은 시간을 걷다|무변광대한 허공을 벽 삼아 가부좌를 틀다|스스로 몸을 벽에 부딪고 돌로 찧다|지장보살과 미륵보살 그리고 《점찰선악업보경》|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곳, 불사의방이라네|⊙ 의상봉 불사의방터

8장 부안 원효굴터Ⅱ원효방에 방부를 들이다 l 눈을 감아도 벽이요, 눈을 떠도 벽이네 l 표암 강세황의 우금암 나들이 l 마르지 않는 다천茶泉과 사포성인 l 진표율사와 원효성사 그리고 의상대사 l 제자리를 지키는 아름다움 l 강세황은 어디에서 우금암을 본 것인가 l 여태 언급되지 않은 우금암 각자 l 나즛나즛, 둥긋둥긋한 토산 l ⊙ 능가산 원효굴터


출판사 서평

전라북도 골골샅샅의 폐사지 여덟 곳을 가다

저자는 폐사지 답사기 1권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름다움이란 음양 모두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결코 그중 어느 하나가 다른 어떤 것에 비해 우월하거나 우선하지 않는다.” 화려한 볼거리가 드물더라도 결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폐사지의 매력을 설명하기 위해 ‘음’의 미학을 끌어들인 것이다. 특히 이번 책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에서 다루고 있는 전라북도의 폐사지들은 저마다 상서로운 음의 기운을 특징적으로 머금고 있다.

묘하게도 전라북도의 폐사지를 돌아볼 때는 다른 여느 지방의 순례와는 또다른 기분에 휩싸인다. 더욱 쓸쓸하기도 하고 깊은 고독에 휩싸여 말을 잃기도 한다. 그것은 전라북도의 폐사지가 뿜어내는 치명적인 매력이다. 그렇기에 더욱더 자신을 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전라북도 폐사지의 분위기가 그러한 것은 폐사지에 떠돌고 있는 사연들 때문일 것이다._5쪽

이 책은 이러한 독특한 뉘앙스를 뿜어내는 전라북도의 절터 여덟 곳을 답사한 기록이다. 모두 여덟 권으로 기획된 ‘이지누의 폐사지 답사기’의 두 번째 권으로, 앞으로 이 시리즈는 충청, 경기, 경주, 강원, 경남, 경북 편으로 차례차례 이어질 것이다. 전라북도의 폐사지 답사는 남원 만복사터에서 시작해, 남원 개령암터와 호성암터, 완주 경복사터와 보광사터, 고창 동불암터, 그리고 부안 불사의방터와 원효굴터로 이어진다. 저자는 때로는 시적인 감상으로, 때로는 설화와 전설과 민담으로, 때로는 불교와 관련된 역사적 사료로 절터를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 또한 현장의 느낌을 실감나게 전달함으로써 독서의 흥취를 더한다. 이를 통해 보통 관광객의 눈으로는 식별되지 않는 전라북도 절터의 진면목을 순례자의 맑은 눈으로 또렷하게 부각시킨다.

고요가 흐르는 전라북도 절터의 치명적 매력
절터는 엄밀히 말하면 버려진 장소다. 예전에는 불사를 드리는 사람들로 흥성거렸을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사람이 찾지 않는 곳이다. 그것은 외로움과 고독을 뜻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즈넉한 고요를 뜻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절터는 인간 위주의 생각에서 벗어나 자연이 들려주는 진실의 소리에 새삼 주목할 수 있게 해준다. 저자는 이것이 부처님의 소리를 직접 듣는 것과 진배없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듯 폐사가 되어 절의 흔적이 가뭇해지고 나면, 절은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처님 머문 자리에 풀과 나무가 자라고 물이 고이는가 하면, 눈이 쌓이고 구름이 머문다. 그렇다. 폐사지를 순례하려면 목탁과 염불 그리고 풍경과 범종 소리쯤은 앨범에 끼워 책장에 꽂아두거나 서랍 속에 넣어놓고 다닐 필요가 있다. 절터를 에워싼 채 머무는 자연의 소리는 부처님의 법어와 동격이기 때문이다. 이 순정한 새벽의 맑은 새소리 한줌이 어찌 청량한 부처님의 말씀보다 못하겠는가._225쪽

더구나 전라북도의 절터에서 마주치는 고요는 특별하다. 그것은 이 고요가 전라북도만의 독특한 미륵아래에서 인지되기 때문이다. 전라북도의 미륵신앙은 지장보살 신앙과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다. 미륵은 현세에서 구원받지 못한 중생들이 앞으로 펼쳐질 세상에서의 구원을 바라며 복을 비는 부처를 가리키고, 지장신앙의 근본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참회하는 것이다. 즉 전라북도의 미륵사상은 ‘참회를 통한 구원’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전라북도 절터의 고요는 순례자에게 자신을 돌아보는 참회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유독 《돌들이 끄덕였는가, 꽃들이 흔들렸다네》에서 저자 스스로에 대한 솔직한 반성이 두드러지는 까닭이다. 중요한 것은 어둠 속에서의 참회가 결코 자기비하인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되짚어 내려오는 걸음, 가벼워야 할 텐데도 결코 그렇지 못했다. … 주변 누구에게 단 한 차례도 나는 빛이자 희망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살아온 나의 삶을 참회하는 걸음이 어찌 가벼울 수 있을까. 산 아래에 세워둔 자동차까지 내려오는 내내 일부러 낙엽을 발로 차며 걸었던 까닭은 나 자신에 대한 소심한 화풀이였다._278쪽

불사의방에서 만난 진표율사의 망신참이라도 흉내 내려는 것인 양 남김없이 파헤쳐져 비루해진 나 자신이 어둠의 벽에 온몸을 부딪는 모습이 환영처럼 보였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마땅히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참회밖에 별다른 무엇이 없었다. … 더구나 무엇에 대한 참회인지 구체적인 것도 없었다. 나의 존재 전체에 대한 참회일 뿐이었으니까 말이다. 사실 깜깜한 원효방에서 무엇과 맞닥뜨릴지 아무 준비도 없이 깃들었다. 그러니 뜻밖의 참회는 밤길을 걸어 다다른 순례자에게 선물처럼 주어진 것이다._293쪽
현장이 답이다- 답사 정신의 백미

저자 이지누가 에디팅한 〈디새집〉은 2000년대 초 한 일간지에서 ‘잡지’ 형식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올해의 책’에 선정된 바 있다. 그만큼 사진과 기사의 퀄리티가 웬만한 일반 단행본 못지않고 오히려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절터 시리즈에서도 이런 그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사진은 아름다우며 글은 적확하다. 이는 저자가 같은 장소에 수십 번이라도 찾아가 취재하는 현장 정신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온 결과다. 그는 단지 보기에 좋은 사진, 읽기에 좋은 글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발견 혹은 진실을 목적에 두고 작업한다.
이 책의 8장 부안 원효굴터 편에서는 이런 치열한 답사 정신의 백미를 목격할 수 있다. 그는 원효굴이 위치해 있는 우금암 근방을 샅샅이 돌아보며, 조선 후기의 유학자이자 화가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의 그림 〈우금암도〉에 대해 철저히 비판한다. 강세황의 그림을 보면, 개암사 뒤편의 우금암 봉우리가 셋으로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이 봉우리들의 높이는 왼쪽이 가장 높고 오른쪽으로 가면서 순차적으로 낮아진다. 하지만 놀랍게도 조선 최고의 화가가 그린 우금암의 모습은 이지누 저자가 가서 확인해본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실제로는 봉우리가 두 개일 뿐이며, 높이도 오른쪽의 동봉이 왼쪽의 서봉보다 더 높다. 〈우금암도〉에서 묘사된 봉우리의 모습은 개수와 높이 면에서 전혀 뜬금없는 것이다. 이지누 저자는 수차례 이곳을 방문해 여러 각도에서 우금암을 바라보았지만 〈우금암도〉와 일치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는 이런 오류를 여러 자료를 동원해 비판하며, 여러 컷의 사진으로도 담았다. 그의 글과 사진이 얼마나 현장성에 바탕을 두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진실을 목적으로 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철저한 현장 정신은 아직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발견을 가능하게도 했다. 바로 우금암이라는 각자 발견이다. 우금암 근방을 골골샅샅 조사하던 저자는 원효방을 오르내릴 수 있는 사다리 근처에서 이 각자를 발견했다. 이는 국내 관련 학계의 어느 자료에도 보고되지 않아 그 존재를 알 수 없던 것이었다. 이로써 새로운 유적을 발견하는 한편, 우금암의 주봉이 서봉이 아니라 동봉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도 마련되었다.
물론 이런 인문학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만이 절터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절터는 깊고 넓다. 위에 소개한 작업이 절터의 깊이라면, 이 책에 수시로 소개되는 아름다운 시와 소설은 절터의 넓이다. 불자와 유자들의 시는 물론,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에서 《혼불》에 이르기까지, 저자는 고대와 중세, 현대를 넘나들며 절터를 풍성한 이야기로 그득그득 채워놓는다. 옛적에 법석이 펼쳐졌던 절터가 다시 소생하길 바라는 저자의 간절한 염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잊고 고요한 가운데 그저 쉬어도 좋은 것이 전라북도의 절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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