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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불교의 가르침에서 완벽하게 분노를 정복할 수 있는 길을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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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상품명 분노 (불교의 가르침에서 완벽하게 분노를 정복할 수 있는 길을 찾다)
정가 12,000원
판매가 10,800원
저자/출판사 로버트 A. F. 서먼 / 민족사
적립금 540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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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수 221
발행일 2017-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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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500원

책소개


달라이 라마의 제자이자 타임지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25인’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린 불교학자 로버트 서먼의 ≪분노≫. 이 책은 뉴욕 공립 도서관과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가 공동 기획하여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집필을 의뢰한 ‘우리를 지배하는 7가지 욕망의 심리학’ 시리즈 중 세 번째 책이다. 이 시리즈는 인간 존재의 최대 약점이자 ‘죄악(deadly sin)’으로 여겨져 온 7가지 근원적 욕망(교만, 시기, 탐욕, 탐식, 분노, 정욕, 나태)에 대해 깊이 있게 고찰하고 있다. 

‘분노’는 그중에서 가장 파괴적인 감정이다. 이 책의 저자는 분노를 지극히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거나 배척하는 것을 지양하고, 분노에 대한 진정한 성찰을 통해 분노를 극복하고, 분노의 에너지를 자유의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다는 중도의 입장에 선다. 분노에 대한 우리의 습관적 인식을 깨고, 우리 스스로 내 안의 분노를 극복하는 길을 가도록 이끄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한국어판 《분노》는 경희대 철학과에서 불교철학과 비교철학을 가르치고 있는 허우성 교수와 불교철학을 전공한 이은영 선생이 심혈을 기울여 번역했다. 《분노》를 안내하는 ‘역자의 말’과 꼼꼼한 역주가 이 책의 이해를 돕는다.




저자소개

저자 로버트 서먼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종교학과의 인도-티베트 불교학 명예교수이다. 티베트 문화 보존에 헌신하는 ‘티베트 하우스 유에스(Tibet House US)’의 공동 설립자이자 원장이기도 하다. 1962년 달라이 라마를 처음 만났고, 티베트 불교 비구계를 받은 최초의 서양인이 되었다. 몇 년 후 환속한 이후에도 수십 년 간 달라이 라마의 제자이자 친구로서 친분을 이어오고 있다. 
티베트 불교 경전을 번역하고, 다수의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내면의 혁명(Inner Revolution)》(Riverhead books, 1999),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Infinite Life)》(박미경 역, 한겨레출판, 2005), 《분노를 다스리는 붓다의 가르침(Love Your Enemies)》(윤서인 역, 담앤북스, 2014), 《달라이 라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Why the Dalai Lama matters)》 (문정희 역, 김영사, 2011) 등이 있다.



목차

《분노》를 자비로 안내하며_역자의 말 ? 7 
법구경 구절 ? 15 
저자 머리말 ? 21 

1장 중대한 순간 … 39 
2장 분노에 항복하기 - 개관 … 44 
3장 분노란 무엇인가? … 65 
4장 분노에서 해방되기 - 서양의 길 … 74 
5장 분노에서 해방되기 - 불교의 길 … 98 
6장 분노 초월의 요가 …108 
7장 내성耐性의 인내 …130 
8장 통찰적인 인내 …140 
9장 용서하는 인내 …159 
10장 분노에 항복하기 - 궁극적 차원 …206 



책 속으로

더 이상 분노에 매여 있지 않은 불을, 주변을 따뜻하게 하고 환히 밝히며 다른 이의 고통을 태워 버리는 데 선용할 수는 없을까? 지혜는 불을 휘둘러 등불로―무지와 편견이라는 어둠, 그리고 자기중심적인 착각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로―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붓다는 끝없는 고통을 겪는 다른 이들의 파멸에 대해서 격렬하게 참을 수 없어하신 분이 아니신가?(32쪽) 

증오로 가득한 분노는 결코 유용하지 않으며 정당화될 수도 없고,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항상 해롭다. 이것이 체계적으로 조직될 때 전면전이 되고 핵분열을 일으키게 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러한 분노는 언제나 통제와 억제가 가능하며 결국 방지하거나 피할 수 있고 초월할 수 있다. 분노의 노예라고 해도 틀림없이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33쪽) 

우리나라(미국)와 세계가 다시 한 번 큰 전쟁의 발발 위험에 처한 지금, 고통스런 주제일지는 몰라도 우리가 함께 분노에 대해서 성찰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전쟁”이란 “조직화된 분노(organized anger)”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문화적으로 조직화된 분노는 아킬레스(Achilles)부터 터미네이터(Terminator)에 이르는 영웅들을 모델로 해서, 우리의 군국주의적이고 폭력적인 생활방식의 표준을 세우고 있다. 정치적으로 조직화된 분노는 (이제 대테러 선제공격이라는 미명 하에) “테러”를 정복하기 위한 미국의 공격적인 세계 전쟁이 되고 있는데, 그 테러 속으로 기업화된 정부와 그런 정부의 언론 홍보가 우리를 오도하고 있다. CIA의 전(前) 국장은 점점 커져오는 이 세계 전쟁을 공공연하게 “제4차 세계 대전”(‘냉전’을 제3차 세계 대전으로 간주함)이라고 불렀다. 이는 한 세기가 넘게 쉬지 않고 증대하고 있던 지구적인 전쟁 체계가 확대된 주요 사건이다. (p.40) 

분노는 전쟁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수소폭탄의 분노, 화학적 분노, 생물학적 분노는 대규모 살상 무기가 되어 이 소행성 위의 모든 생명체를 파멸시킬 수 있음이 분명하다. (생명의 연속성이라는 상식적인 관점에서 보면, 어떤 존재도 달콤한 망각을 보장받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현재의 생명-형태(life-form)나 거주지 지구 행성을 잃는 것일 뿐, 지속적으로 공포에 빠진 존재들은 새로운 집을 찾지만 거기에서도 고통을 겪을 뿐이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세계 전쟁은 여러 형태의 분노를 신격화한다. 그러한 신격화된 분노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세계 체제를 지배하고, 그 체제의 폭력적인 경제를 지지하고 있고, 체계 내부에 존재하는 예술, 문화, 미디어, 교육 커리큘럼, 권위주의적 공동체와 가족 형태, 개인의 인격 형성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분노에 대해서 조사하고 그 본성을 살펴보며, 분노가 정말로 죄인지 독인지를 평가하고, 분노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더욱더 급선무가 되었다. 핵심적인 질문은 다음과 같다. 분노는 삶에서 불가피한 부분이고 타고난 것임에 틀림없어서, 견디며 체념의 태도로 관리해 나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분노는 금생에 직면하고 극복할 수 있는 것, 그리하여 용인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개인적 ? 사회적 ? 지구적으로 그것에 반대하고 패배시킬 수 있는 것인가? (pp.42~43) 

지혜가 당신을 자아-절대화하는 망념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면, 주체와 객체를 각각 단단한 덩이로 응결시키던 에너지는 상대화되어 창조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그리고 망념 자체는 “거울처럼 비추는 지혜(mirroring wisdom, 大圓鏡智)”가 된다. 이것은 다이아몬드처럼 하얀 색의 땅(地)의 원소, 물질성[色蘊]의 과정에 해당한다. 그리고 욕망 중독은 연결성의 에너지가 되어 각각을 구별하는 지혜(individuating wisdom, 妙觀察智)가 된다. 이는 루비같이 붉은 불[火] 원소가 되고, 식별[想蘊]의 과정에 해당한다. 교만 중독은 평등하게 보는 지혜(equalizing wisdom, 平等性智)가 된다. 토파즈 같은 금색의 물[水]의 원소, 지각[受蘊]의 과정에 해당한다. 질투 중독은 모든 것을 성취하는 지혜(all-accomplishing wisdom, 成所作智)가 된다. 에메랄드 같은 초록색의 바람[風]의 원소, 정신 작용[行蘊]의 과정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분노 중독은 궁극 실재 완전 지혜(ultimate reality perfection wisdom, 法界體性智)가 된다. 사파이어 같은 파란색의 허공[空]의 원소, 의식[識?]의 과정에 해당한다.(pp.105~106) 



출판사 서평

분노 중독의 시대에 던지는 화두 
분노의 노예가 될 것인가, 분노로부터 벗어날 것인가?
 

요즘 ‘분노 조절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처음 만난 사람을 향한 ‘묻지마’ 폭력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과 테러·전쟁에 이르기까지, 지금 이 시간에도 분노의 원인을 자기 마음 밖에서 찾는 이들이 벌이는 파괴 행위와 끔찍한 살육 앞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해진다. 그러나 분노를 없애고, 분노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도 우리는 분노를 극복하는 방법을 모른다. 기껏해야 분노에는 더 큰 분노로, 폭력에는 더 큰 폭력으로 대응하는 악순환을 반복할 뿐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분노의 속박에서, 분노에서 나오는 폭력의 속박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폭력과 전쟁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분노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분노 없는 인간의 삶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분노가 가져오는 끔찍한 공포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시간을 내어 성찰하는 일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분노는 서양의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 오랫동안 “대죄(大罪, deadly sin)”로 여겨졌다. 동양의 불교에서도 분노(dve?a, 瞋)는 번뇌(addiction, kle?a), 또는 독(vi?a, 毒)으로 불리는데, 그것은 탐욕[貪], 무지[癡]와 함께 삼독(三毒)에 속한다. 삼독은 고통스러운 삶의 진정한 원인, 삼사라(sa?s?ra, 輪廻), 즉 해탈하지 못한 채로 좌절하며 무한히 윤회하는 삶의 진정한 원인이다. (p.39) 

분노는 인간 존재의 최대 약점이자 ‘죄악(deadly sin)’으로 여겨져 온 7가지 근원적 욕망(교만, 시기, 탐욕, 탐식, 분노, 정욕, 나태) 중 가장 파괴적인 감정이다. 때문에 서양의 기독교와 이슬람교에서 분노는 오랫동안 ‘대죄(大罪)’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금은 서양에서 분노가 ‘죄’라기보다는 “부정적인 감정”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또한 분노는 의분(義憤)을 드러내는 신의 영역에 속한 것, 혹은 폭풍이나 번개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사고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평화, 군비축소, 비폭력을 주장하는 것이 비현실적이고 유토피아적 이상인 것처럼 보인다. 분노를 불가해한 자연의 힘, 인간에게 내장되어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분노는 극복될 수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분노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한편 불교에서는 분노에 대해 매우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불교에서 분노(瞋)는 번뇌로서, 탐욕(貪) · 무지(癡)와 함께 삼독(三毒)에 속하는 것으로, 삼독은 해탈하지 못한 채 끝없이 윤회하는 삶의 원인이다. 때문에 분노는 제거의 대상이다. 
저자는 분노에 대한 이와 같은 두 가지 극단적인 견해에 대해 전자를 ‘분노에 항복하기’라고, 후자를 ‘분노에서 해방되기’라고 정의했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전자는 분노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절대로 분노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분노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단지 그것을 억제·조절하는 일 뿐이다. 후자는 분노가 완전히 근절될 수 있고, 분노가 전적으로 파괴적이기 때문에 완전히 없애버려야 한다는 견해이다. 저자는 분노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선 이런 양극단의 견해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분노가 어떤 에너지를 갖고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회피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전자의 견해를 따르지만, 가부장적·군국주의적 문화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분노를 불가피한 것으로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파괴적인 분노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고 유익하지도 않다는 점에서는 후자의 견해, 즉 ‘분노에서 해방되기’의 입장을 따른다. 그리고 인간이 분노를 철저히 없애 열반의 지복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후자의 견해에 동의한다. 저자는 이 두 관점을 종합하여, 분노를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으며 분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즉 분노가 파괴적으로 부리던 에너지를 창조적인 용도로 선용하자는 것이다. 저자는 분노가 독점했던 ‘불’을 주변을 따뜻하게 밝히고 다른 이의 고통을 태워 버리는 데 선용하는 것만이 분노 중독이 고통과 증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본다. 

분노에 중독되는 순간 고통과 증오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분노의 에너지를 자유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순간 
분노는 행복으로 가는 열쇠가 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분노의 에너지를 선용할 수 있는가? 어떻게 분노를 극복할 수 있을까? 결국 저자는 분노의 에너지를 정복해서 자비의 에너지로 바꿈으로써 그 에너지를 재배치하자는 것이다. 역자의 말처럼, 분노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 다른 이들이 고통을 겪지 않고 행복해지도록 도우려는 의지를 발동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분노와 증오로부터 자비와 사랑으로 당장 바꾸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 내성(耐性), 인내, 자제, 용서라는 중간 지대를 제시한다. 
이 책에서는 샨티데바의 《입보리행론》에 나오는 <인욕품>의 가르침을 통해 분노 대신 사랑과 자비를 닦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선 분노가 무엇인지, 그것이 상처와 고통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 정신적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샨티데바는 분노가 습관적·본능적으로 자신을 실체화하고 과도하게 타인을 대상화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비난받을 짓을 한 악마가 따로 있다고 믿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적’은 우리 마음의 투사에 불과하다. 내 마음이 투사된 상대에 대한 두려움과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몸부림이 바로 분노다. 분노로 치닫는 내 마음은 그런 내적 충동의 기계적 반응인 것이다. 
저자는 이런 메커니즘을 이해하여 증오와 결합된 분노에 대한 내성을 키우고, 인내와 자제심을 기르고, 증오심과 분리된 자비심을 길러 분노의 중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역설한다. 

“분노는 오직 분노하지 않음으로써 파괴될 뿐이다! 분노에 대한 효율적인 분노는 오직 내성의 에너지가 되는 길이다.”(p.158) 

“인내는 중독과 고통의 맹공격에 대항하는 구극의 갑옷이다.”(170) 

“우리의 분노한 마음은 말한다! “그는 단지 사악한 적이니 그를 파괴해야 한다”고.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게 대답한다. “우리는 불법佛法, 즉 다르마가 비인격적인 것이어서 우리를 도우려는 의도를 갖지 않는다고 해도, 그 불법에 감사하고 그것을 사랑한다. 적은 최고로 희유稀有하고 중요한 초월의 덕을 닦을 기회일 뿐이다”라고.”(p.199) 

“인내 요가, 통찰 요가, 용서하는 인내의 요가들로 분노를 정복해도 그 분노의 맹렬한 불은 여전히 남아있어서, 지혜를 갖춘 영웅적인 천사가 그 불을 창조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분노는 이제 창조 초월이 되고, 기쁨에 찬 영웅의 에너지가 된다.”(p.208) 

분노를 내성으로 바꾸고, 그 다음에는 자비와 사랑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수와 붓다의 가르침은 통한다. 성인들은 한결같이 분노도, 인내도 우리의 마음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살육과 파괴의 지옥도도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내고, 지혜를 통한 분노로부터의 해방도 우리 마음이 해내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세계를 만드는 데 책임을 져야 한다.”(p,161)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어떤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느냐다. 중요한 건 분노라는 파괴적 감정의 중독에서 헤매고 있는 나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그것으로부터 떠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다. 
분노의 에너지를 선용함으로써, 우리는“분노의 통제 하에 있었던 강력한 에너지, 즉 모든 그림자를 물리치는 불과 연소(燃燒)의 에너지, 빛의 에너지를 회복하고, 그것을 지혜롭게 사용”(p.206)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타인이 자기보다 더 중요하고, 지혜가 무지보다 복된 것이며, 자유가 집착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 되고, 사랑이 증오로 가득한 분노보다 더 강력한 것이 되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 
분노의 완전정복, 그것은 결국 우리의 지혜로운 마음에 달린 문제다.“분노의 노예도 스스로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p.33)는 것, 이것이《분노》가 우리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다. 

역자의 말 

《분노》를 자비로 안내하며 

분노의 대한민국, 성난 시민! 이 책을 번역하고 있던 2016~7년 한국의 겨울을 단적으로 묘사하던 말이었다. 대다수의 언론은 촛불시위를 보도하면서 분노의 자연스러움, 정의로움, 당당함을 지적하며 수없이 분노를 예찬했다. 많은 사람들은 대통령의 법 위반과 국민의 신임에 대한 배신을 고려할 때, 분노하지 않으면 오히려 ‘비정상’이라고도 했다. 
우리는 하지만 경험으로 분노가 유용하면서도 위험한 감정임을 잘 알고 있다. 잘 다루면 그 에너지를 건설적으로 사용할 수 있고, 잘못 다루면 증오, 저주, 파괴와 살인, 아니 전쟁의 나락으로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동서고금의 수많은 현자들이 그 위험성을 지적해왔고, 우리 언론 역시 최근까지도 분노를 잘 조절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분노의 순기능을 인정한 대표적인 철학자 중의 하나로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나 친지가 모욕을 당했을 때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 자기방어도 하지 못하는 노예 같은 사람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이 철학자는 화를 낼 때 다섯 기준은 지켜야 한다고 보았다. 분노하기에 마땅한 일, 분노하기에 마땅한 상대, 분노의 강도(强度), 분노의 타이밍, 마땅한 지속 시간이 바로 그것들이다. 다섯 기준은 이성에서 온다. 분노라는 감정과 이성의 균형을 잘 유지하면 ‘중용의 성격’을 지닌 자로 칭송받는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런데 힌두교와 불교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분노에 대해 아주 엄격한 태도를 취한다. 특히 불교는 분노[진瞋]를 무지와 탐욕과 함께 삼독(三毒)의 하나로, 제거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이런 불교의 입장에서는 비록 ‘공분(公憤)’이라고 해도, 그것이 증오나 폭력을 초래한다면 거기에 동조하기 어렵다. 1950년 중국의 인민해방군이 동부 티베트로 침공해온 이후 인도로 망명해온 14대 달라이 라마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는 마오쩌둥을 포함한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게 분노 대신 자비를 보낸다고 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대영 제국과 인도 내부의 카스트 제도라는 정치적?사회적 악에 대해 힘껏 저항하고, 힌두 무슬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목숨 건 단식을 감행하면서도, 분노를 정당화하는 일을 극히 경계했다. 
달라이 라마의 제자이자 친구인 서먼은 《분노》에서《입보리행론》 <인욕품>을 번역하고 해설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분노에 대한 불교적인 태도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그 중에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나는 원수와 함께 인내를 수련할 수 있네. 
그래서 그는 그를 인내한 결과인 
내 첫 번째 공물을 받을 만하네. 
원수야말로 인내의 원인이기 때문에.《입보리행론》 <인욕품> 108 

서먼은 이 책에서 ‘원수가 인내의 원인이므로 나의 공물을 바칠 만하네’라는 취지의 구절을 설명하면서, 달라이 라마가 티베트와 티베트 지도자, 티베트 국민들 최대의 적인 마오쩌둥에 대해 수십 년간 명상한 것이 그 취지를 잘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로 언급하고, 문답 하나를 덧붙이고 있다. 아시아 협회(Asia Society)에서 한 번은 달라이 라마에게 세계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러자 달라이 라마는 비폭력의 사도인 간디뿐만 아니라, 폭력의 사도인 마오쩌둥, 티베트의 자유와 사원 등 불교 기관들, 그 환경과 백만 명이 넘는 티베트인들을 파멸시킨 마오쩌둥이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인욕품>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그래서 인내가 길러지는 것은 
가슴에 증오를 지닌 자들에 의존해서다. 
증오를 지닌 자들은 정법正法처럼 존경받을 만하네. 
둘 다 인내의 원인이므로.《입보리행론》 <인욕품> 111 


“증오를 지닌 자들은 정법처럼 존경받을 만하네.” 얼핏 황당해 보이는 이 구절에 대해 서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에 진정한 붓다의 마음, 평등성의 지혜-증오로 가득한 마음과 정법을 평등하게 보는 지혜-가 있다! 여기에 관용이 없는 자를 인내하는 관용이 있다. 여기에 증오에 답하는 사랑, 악에 답하는 선善이 있다. 이것은 과거에 있었던 모든 위대한 영적 인물들과 신들의 영역이다.” 증오로 가득한 마음과 정법을 평등하게 보는 지혜, 그 지혜를 얻은 경지를 서먼은, 위대한 영적 인물들과 신들의 영역으로, 곧 진화의 극점으로 보고 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붓다, 간디, 달라이 라마는 진화의 극점에 도달했거나, 아주 근접한 인물로 보인다. 서먼은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들이 진화하여 자력으로 완전한 불성(佛性)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진화의 극점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 같다. 수많은 다생(多生)을 통해서라도 말이다. 
이 책은 결국 분노의 에너지를 정복해서 자비의 에너지로 바꾸자고, 그 에너지를 재배치하자고 한다. 이는 무슨 의미인가? 분노가 아니라 사랑과 자비, 다른 이들이 고통을 겪지 않고 행복해지도록 도우려는 의지를 발동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분노와 증오로부터 자비와 사랑으로 당장 바꾸라고 강요하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너무 심하게 다그치는 것이다. 그래서 <인욕품>과 서먼은 내성(耐性)?인내? 자제?용서라는 중간 지대를 제시하고 있다. 해를 입었을 때, 또는 해를 입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증오심과 분리된 자비심을 내는 것이 목표이지만, 그 전에 증오에 대한 내성을 키우고, 인내와 자제심을 기르자는 것이다. 
분노 대신 사랑과 자비를 닦으라는 <인욕품>, 달라이 라마 그리고 서먼의 입장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 민족은 분노에 대해 상당한 친근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서이다. 이런 친근감은 침략과 불의에 대한 저항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을까? 변영로의 시 논개(論介)의 첫 소절이 그런 연관성을 짐작케 한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거룩한 분노 - 궁극적인 자기희생을 수반하는 이런 분노에 대해 달라이 라마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 그는 중국의 침략과 지배에 항의해서 분신자살한 티베트인 스님들과 소년들의 행위에 대해 평가하기를 참으로 난처해했다. 하지만 권장하지는 않았다. 
한국인들에게 간디나 달라이 라마처럼 서로 ‘원수’를 용서하라고 말하면 대다수는 무골충이라고 욕할 지도 모르고, <인욕품>에서처럼 증오를 지닌 자를 정법처럼 존경하자고 하면 분별이 없는 자라고 비난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분노》는 달라이 라마를 닮으라고 하는 것 같다. 우리가 그를 닮아서 자비가 분노를 이긴다는 진화의 극점에 가까워지면, 왜적이 백성을 살육한 일에 대해 이순신이 느꼈다는 원통한 분노[痛憤], 논개의 거룩한 분노, 그리고 2017년 탄핵을 이끌어 낸 시민의 분노를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 한국인을 위한 감정교육의 첫걸음은 분노 성찰이 아닐까 한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면서 《분노》를 읽어보자. 

허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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