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위해 재구성한 여정. 인도네시아 보로부두(가운데 맨 아래)를 시작으로 인도, 인도차이나, 다시 파키스탄부터 실크로드(실선)를 따라 중국으로 동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경주 석불사에서 마무리.
“가서 보니 이렇더라” 수준의 기행문이 아니다. 예습 하고, 다녀와선 책 찾아 복습 하고, 또 가게 되면 재확인하고 돌아와 다시 공부했다. 세 번 통째로 고쳐 쓰고, 거기서 예닐곱 번 더 다듬고 보충하고, 교정을 거듭할 때마다 불어난 분량이 끝내 600쪽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유일한 아픔은, 당시로선 첨단이던 비디오카메라로 주로 찍고 다녔더니 막상 책에 쓸 만한 사진은 적더라는 것. 다시 책들과 인터넷사이트를 뒤져 따로 1만 3천여 장의 컬러사진 풀을 만들고, 거기서 추리고 추려 396장으로 출판사와 ‘타협’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발로 쓴 책이다. 그냥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만으로 안 되고, 수십 년 여정을 꼼꼼히 기록하고 보관해 놓고, 미진한 데를 틈틈이 찾아 보충하고, 그걸 또 몇 년 동안 앉아서 쓸 정도의 뚝심까지 있어야 가능한 책이다. 짧은 추천글을 쓴 조정래 소설가는 이것을 ‘치열한 삶의 열정’이라는 한마디로 요약한다.
“부럽고, 존경스럽다. 그 치열한 삶의 열정이. 최영도 변호사는 인간의 삶을 얼마나 의미 깊게, 폭넓게, 멋지게, 겹겹이 살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진지하게 보여 준다. ‘인생은 한번 살아 볼 만한 것’이라는 말을 실증하는 존재다. 모두의 사표(師表)다.” (조정래, 소설가)
읽으면 가고 싶고, 안 읽고 다녀오면 땅을 치는 책
저자 최영도 변호사(80)는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모임(민변) 회장, 참여연대 공동대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등을 지낸 1세대 인권변호사다. 앞서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2011, 기파랑 刊)라는 제목의 유럽 미술관 답사기도 낸 적 있는 저자답게, “공부하지 않고 가는 문화유산 답사는 헛걸음”이라는 게 지론이다.
“큰 기대를 갖고 떠난 1997년 8월 나의 제1차 둔황 답사는 실패로 끝났다. 공부를 거의 하지 않고 갔기 때문이다. 그 후 파키스탄 라호르에서 중국 시안까지 실크로드를 횡단하며 다시 둔황을 가게 되었다. 이번에는 공부 좀 했지만 그래도 시험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수험생처럼 불안했다. 막고굴은 정직하다. 꼭 공부한 만큼만 보여 준다. 그냥 관광 삼아 둘러볼 곳은 아닌 것 같다.” (제7장 둔황, 193쪽)
‘아잔타부터 석불사까지’로 요약한 이 여정의 유적 대부분은 종교 유적이면서, 아시아 고대 건축과 미술의 보고(寶庫)다. “그 지역의 거의 8할은 불교미술유적이었고, 그곳의 답사는 바로 불교미술 순례나 다름없었다”(5쪽). 700년 걸쳐 조영된 인도 아잔타 유적(제2장), 900년 걸린 둔황 막고굴(제7장)을 제대로 보려면 불교 일반과 불교미술사에 관한 기본지식은 물론, 해당 지역의 왕조사와 문화사까지 꿰뚫어야 했다. 앙코르 와트와 앙코르 톰(제4-5장), 둔황(제7장), 티베트(제8장)의 서론들은 그 자체 캄보디아와 중국 서역과 티베트의 간추린 역사이고, 해양의 소승불교, 대륙의 대승불교, 그 큰 갈래인 티베트불교 각각의 입문도 된다. 여행길에 맘먹고 챙겨 넣어도 무겁지 않을, 그야말로 깨알지식 가득한 보물창고다.
화려한 종교미술 뒤, 그늘을 생각하다
변호사라는 직업 탓일까,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과 미술품들과 이런 걸작들을 남긴 장인의 솜씨에 넋을 잃었더라도, 수시로 그 뒤편에 가려져 있을 장인과 민초들의 피와 땀을 생각한다. 몇 군데를 빼면 대부분은 현지 주민들이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을 서구 식민주의자들이 뒤늦게 알고서 새로운 ‘발견’처럼 호들갑을 떨거나, 본래 주인들을 얕잡아보거나, 자기네 기준으로 이쪽 유물을 평가하는 처사에 분개하기도 한다. 이 책이 한갓 상세한 답사기나 안내서에 그치지 않는 이유다.
“무모한 전제군주의 허황된 욕망이라기엔 노예처럼 부려진 백성들의 희생이 너무 크고 아프다. 왕은 이 분묘사원을 완공한 해인 1150년 참파로 출정한 후 사라져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학정(虐政)에 대한 신의 노여움일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폭군이 학정으로 만들어 낸 초대형 성과물을 관광하면서 감탄하고, 그 후예들은 그 덕에 먹고산다.” (제4장 앙코르 와트, 139쪽)
“티베트인들은 옷 몇 벌과 담요 두어 장, 식기와 숟가락뿐인 최소한의 소유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검소하게 살고 있는 민족이다. 그런데 가장 사치한 궁전과 사원을 가지고 있다니,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백성은 헐벗고 검소한데 왕궁과 사원은 사치의 극을 달리고 있다니, 이런 것이 정말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종교이고, 백성을 위한다는 정치의 진정한 모습이란 말인가?” (제8장 티베트, 272쪽)
“서양에서는 이 [백제관음상]을 ‘동양의 비너스’라고 칭찬해서 부른다고 한다. 그러나 비너스가 누구인가? 어엿한 유부녀면서 남신들과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고, 걸핏하면 옷을 훌러덩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남성의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불량한 여인 아니던가? 어디 감히 관음보살에게 그런 비천한 여인의 이름을 붙이는가.” (제12장 일본 3대 미술문화재, 471쪽)
길은 결국 석불사로 통했다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라면 곧 불교와 불교미술 동점(東漸)의 루트다. 그렇다면 인도, 네팔, 파키스탄에서 실크로드와 중국 신장, 둔황, 용문석굴을 지나고 한반도를 경유해 일본에서 끝나는 것이 순리다. 그러나 저자는 용문에서 훌쩍 건너뛰어 일본 먼저 찍고, 되돌아 한국으로 와서도 충남 서산과 경주 남산으로 에두른 뒤에야 비로소 석불사에 다다른다.
“8세기 중엽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신라 땅에 사는 사람들이 실크로드의 종착지 금성(金城)에 종교와 예술과 과학을 아울러,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벽한 석굴사원을 만들었으니, 이에 견줄 만한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제16장 석불사, 583쪽)
그렇다, 여기서 마침표를 찍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책은 석불사에서 시작해 석불사에서 끝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겉표지를 도배한 큼직한 사진 넉 장 중 하나가 석불사 본존이다. 목차 펼친면의 이마를 장식한 섬네일도 부처와 보살들인데, 어김없이 석불사 석가모니를 넣었다. 본문의 1, 2번 사진도 57년 전 대학 수학여행 간 석불사요, 부록을 제외한 본문 마지막 챕터의 마지막 사진 또한 올려다 본 석불사 부처와 천장이다.
이 글 첫머리에 말한, 저자의 인생을 바꾼 ‘우연히 집어든 책 한 권’이 바로 일본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한국(조선)과 그 예술], 그중에서도 “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였다.
“야나기 선생은 그렇게 많이 보았는데 나는 왜 아무것도 보지 못했나! 그분의 눈은 금강석으로 만든 혜안이었고, 내 눈은 진흙으로 빚은 허접한 눈깔이었단 말인가! 그때 나는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라는 명제를 절실히 느꼈다. 그리고는 석불사를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서장, 14쪽)
그야말로 팔자 좋은 변호사의 가벼울 수도 있었을 문화유산 답사 길은 그렇게 해서 지난한 구도(求道)의 순례길처럼 돼 버렸다. 그렇게 반평생 다녀 어떻게 됐냐고? “지금 누가, 석불사가 왜 어떤 점이 어째서 좋으냐고 물어 오면, 낙제점은 면한 답변을 할 수 있을 것 같다”(제16장 석불사, 580쪽)란다. 그렇다, 구도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책에 별도의 결어(結語)챕터를 두지 않은 속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