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옛날 나무나 바위 혹은 산의 정령에게 소원을 빌던 사람들은 점차 그 바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나무로 형상을 만들어 빌게 되었다. 이후 불교가 유입되면서 그 숭배의 대상은 부처라는 절대적 존재로 옮겨갔고, 절을 지어 그 안에 자신만의 소원을 담은 공간을 만들었다. 그곳이 바로 원당願堂이다. 원당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간절히 발원하는 집’이다. 소원을 빌기 위해 위패나 초상화를 모신 법당을 의미한다. 원당이 있는 사찰을 일컬어 ‘원당 사찰’ 또는 ‘원찰(願刹)’이라고 불렀다. _12쪽
필자가 쓴 이 글에는 관찬 사료와 사찬 사료, 그리고 절에서 전승되는 설화들이 혼재되어 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역사도 아니고 설화도 아닌 잡다한 이야기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비난이 일부분 맞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 이야기 속에서 진짜 역사를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역사학자의 몫이라고 말하고 싶다. _16쪽
훈민정음과 관련된 숫자들의 상당수가 불교의 세계관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총 3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3은 불교에서 33천天을 뜻하며, 이는 수미산 위에 있는 신들의 세계를 상징한다. 《훈민정음 해례본》 맨 첫머리에 “나랏말??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되는 세종의 어지(御旨)는 108자이고, 《월인석보》의 맨 앞에 실린 세종 어지의 글자 수 또한 총 108글자다. 《월인석보》 제1권의 면수도 108쪽이다. 108이라는 수는 중생이 인간 세상에서 느끼는 모든 번뇌를 합한 수다. _61쪽
보살의 공덕을 지었지만 친혈육을 죽인 앙굴리말라에게 부처님은 온몸 가득 종기가 돋게 했다. 세조를 고통스럽게 한 것은 죄의 식이 일으킨 마음의 병이라 할 수도 있다.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이후 심적 고통을 겪는 ‘트라우마’가 바로 세조가 앓았던 병의 근본 원인이 아니었을까. 어떤 처방에도 소용이 없었던 세조는 전국 방방곡곡의 절을 찾아다니며 참회의 기도를 올렸고, 자신의 욕망으로 희생된 인물들의 명복을 빌 수밖에 없었다. 부처님은 권력에 도취된 세조에게 종기라는 과보를 내려 그의 벌거벗은 영혼을 돌아보게 했다. 살아생전 내려진 업경대가 부처님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자비였던 셈이다. _136~137쪽
문종의 때 이른 죽음은 조선왕조에 너무도 많은 불행을 가져왔다. 문종의 어린 아들 단종은 숙부에게 살해당했고, 문종의 사위인 정종도 끝내 죽임을 당했다. 청상과부가 된 단종 비 정순왕후와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는 비구니가 되었다.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은 희대의 패륜아로 낙인찍혔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한 충신들은 능지처참을 당했다. 결과적으로 그 시대를 살다 죽어간 자, 그 시대에 살아남은 자들 모두 ‘시대의 희생양’이 되었다. _141쪽
한 사찰의 역사에는 수많은 인연과 수없는 마음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하나의 인드라망을 이루고 있다. 어떤 이들은 동학사에서 단종의 핏빛 슬픔을 보고, 어떤 이들은 김시습의 통곡을 듣고, 어떤 이들은 누더기가 된 세조의 마음을 읽는다. 또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사육신의 충절과 비애를 느낀다. 어떤 이들은 이곳에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이치를 깨닫기도 하고, 또 다른 이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수행에 몰두한 스승의 발자취를 더듬는다. 그중 일부는 역사로 남고, 일부는 전설로 떠돌며, 대부분은 세월 속에 묻혀 잊힌다. 동학사에 뒹구는 낙엽들이 계룡산의 일부가 되어 사라지듯이. _147쪽
벼랑 끝에 몰려 비구니가 된 이들의 신세를 그리 좋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전근대 사회에서 비구니가 된다는 것은 남자의 부속물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자, 해방구였다. 그들은 불교를 통해 비로소 권위나 인습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있었다. _153쪽
병자호란 때 청에 볼모로 끌려갔던 장유의 딸은 8년 뒤 봉림대군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청에 잡혀있느라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아버지를 위해 원당을 세웠으니, 시흥 법련사가 바로 그곳이다. 청에서 돌아온 며느리를 내쳤던 장본인이 청에서 돌아온 딸자식의 극락왕생 기도를 수백 년간 받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_233쪽
명성왕후의 삶을 들여다보면 붓다가 아들 이름을 ‘라훌라(R?hula, 장애障碍)’라 지은 심정이 백분 이해된다. 첫째와 둘째 딸은 너무 일찍 죽어 깊은 상처를 남기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여자 문제로 속을 끓이게 한 것도 모자라 병까지 들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뒤늦게 낳은 막내딸마저 요절해 가슴의 한을 남겼다. _267쪽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왕실에서 원당을 짓는 가장 큰 이유는 죽은 부모나 남편, 요절한 자식의 극락왕생 발원이었다. 그런데 조선 중기를 지나면서 아들 낳기를 발원하는 왕비나 후궁들의 기도처가 훨씬 더 많이 설치되었다.
억불숭유의 조선,
왕실의 깊은 불심이 빚어낸 찬란한 불협화음
“시대의 마음을 읽는 것이 역사를 통찰하는 가장 쉽고 재미있는 길”이라고 말하는 저자 탁효정(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의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은행나무 刊)는 왕 중심의 조선사 뒤에 가려진 왕실 여인들의 지성스러운 불사를 소설처럼 생생하게 재현한 전에 없던 역사책이다. 한낱 투기와 가십의 소재에 불과했던 왕실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오늘날 우리에게 옛 사부대중의 자생적 개혁 의지와 지혜를 보여준다.
조선이 불교 국가라고 하면 혹자는 역사의 기본도 모르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며 억불숭유 정책을 내걸었고, 세종이 유교 정치 실현을 통해 왕권과 국가 경제력을 강화했다고 배워왔으니 말이다. 우리가 아는 조선사는 《조선왕조실록》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이는 철저히 왕 중심으로 기록된 관찬 사료라 이것만으로는 조선의 면면을 살피는 데 어려움이 있다.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는 《실록》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 퍼즐을 사찬 사료와 설화, 지금도 계속 발굴 중인 사찰의 사지(寺誌)를 통해 입체적으로 구현한다.
조선의 아버지 태조는 물론이거니와 유교의 통치 철학으로 대표되는 세종, 그리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까지, 조선 왕실 사람들은 모두 신실한 불교도였다.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왕실 불사의 흔적은 왕실 불교 사찰, 바로 불교 원당(願堂)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원당은 말 그대로 ‘무언가를 간절히 비는 집’이다. 조선 왕실 사람들은 절을 짓고 그 안에 위패나 초상화를 모셔 자신만의 소원을 담은 공간을 만들었다. 주로 죽은 부모나 남편, 요절한 자식의 극락왕생을 빌기 위해 건축되었던 원당은,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아들 회임을 발원하는 기도처의 성격을 띠게 된다. 불교의 구도적 성격에 기복 신앙이 더해지고, 세종의 한글 창제로 불경이 대중화되면서 불교는 명실상부한 민중 종교가 되었다. ‘원당’이라는 말 자체는 낯설지만, ‘명당’이라던가 ‘영험한 기도처’란 익숙한 민중 신앙으로 지금껏 그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불교 사찰 원당을 통해 본
조선 사회의 파노라마
이름 없는 무장에 불과했던 이성계가 역사상 가장 견고한 왕조라 평가받는 조선을 건국할 수 있었던 계기는 무얼까? ‘상갓집 개’라는 하찮은 별명으로 불렸던 왕실의 먼 친척 흥선대원군이 권력 최상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던 신화와 같은 역사의 이면에는 ‘천하 명당’이 있다. 명당에 부모의 묘를 이장하거나 절을 세우고 성심으로 기도한 끝에 뜻을 이루는 것이다. 조선왕조사를 따라 명당을 읊다 보면 선조부터 순종까지 왕을 열넷이나 배출한 길지 동작동 화장사(현 국립현충원)가 등장한다.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를 이곳에 모셔 손자 하성군이 선조가 되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묻혀 그의 딸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가원수가 되었으니 왕을 배출하는 곳은 확실한 듯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 ‘명당’에 얽힌 아이러니들도 놓치지 않고 언급한다.
원당을 이해한다는 것은 명당을 파악하는 것과 같다. 이는 곧 명당을 애타게 찾았던 그 시대의 간절한 기도, 그 욕망과 아픔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폭군’ 연산군과 광해군, ‘팜파탈’ 조귀인과 장옥정, ‘국모’ 명성황후 등 흔히 우리가 친숙한 별명을 붙여 부르는 왕실 사람들과 그 원당에 얽힌 사연들을 보면 그 호칭이 후대의 역사관, 즉 현재의 욕망과 아픔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는 역사서들의 일편지견에서 벗어나 세종의 독재 군주적 측면, ‘무능한 왕’이란 오명을 벗기 시작한 광해군의 콤플렉스, 공포정치를 펼쳤던 세조의 선업(善業) 등 새로운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본다.
그런가 하면 조선 시대 여성을 다룰 때마다 겪게 되는 고충도 털어놓는다. “여자가 사람이 아니었던 시대, 그들의 삶 속에서 역사적 의미와 인간의 존엄성을 찾”는 일이 마치 목이 좁은 유리병에서 자란 새를 꺼내는 일 같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500년 역사를 가능케 했던 것은 어둠 속에서 촛불을 밝히고 치성을 올린 왕실 여성들의 불심이었고, 또한 역으로 500년간 이어져 온 왕실 불교는 왕실의 여성들이 막막한 삶 너머 내세를 상상하며 내면의 힘을 기를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영겁회귀의 삶과 욕망, 죽음과 참회가 원당에 오롯이 깃들어 있다. 저자는 “한 사찰의 역사에는 수많은 인연과 수없는 마음들이 실타래처럼 엉켜 하나의 인드라망을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찰 원당에 깃든 왕실 사람들의 기도에서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이치를 깨닫는다.
각자도생의 시대,
500년 역사의 조선 원당을 읽는다는 것
현재까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원당은 그리 많지 않다. 불교에 반감을 지닌 조선 유학자들의 방화와 잦은 외침, 일제강점기의 문화 정책, 한국전쟁에 의해 수많은 불교 유산들이 전소 및 훼손되었다. 원당의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은 의성 고운사의 연수전이다. 영조의 기로소 입소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이 건물은 특이하게도 사찰 전각이 아닌 유교식 사당 형태로 건축되었다.
기로소(耆老所)는 정이품 이상의 관직을 역임한 70세 이상 문신들의 친목 기구로, 왕과 함께 연회를 열며 회원 간 화친하는 곳이다. 유교적 효치주의에 기반을 둔 기로소가 자진해 사찰에 원당을 설치했다니, 왕비나 대비의 내탕금을 털어 예산을 마련했던 조선 초중기의 원당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는 조선 후기의 불교가 더 이상 배척이 아닌 공존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전투에서 승군들의 활약과 전쟁 복구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불교의 사회경제적 기여를 인정한 것이다. 게다가 주자학 이데올로기가 더욱 공고해지면서 불교를 견제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은 승려들과 지적?문화적 교류를 확대해 갔고, 불교계 또한 유교와의 융합과 공존을 위한 접점들을 모색했다.
원당을 이해한다는 것은 조선의 역사를 다르게 보는 하나의 창을 내는 것과 같다. 그리고 조선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직면하는 것과 같다. 혼란 정국을 돌파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간절한 바람, 그리고 마침내 이뤄냈던 불교와 유교의 융화는 그리 낯선 얘기가 아니다. 촛불을 밝히고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 그리고 그 기도가 불러온 변화의 바람은 그 누구보다 지금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기댈 곳 없고 의지처가 절실한 이들에게 “가장 영험한 곳, 바로 내 마음속에 원당을 짓고 지성으로 가꾸”는 법을 알려주는 《원당, 조선 왕실의 간절한 기도처》, 역사학자의 엄중함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야사처럼 흥미진진하다. 한 차례 읽어내고 난 뒤 잔존하는 조선사 지식은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