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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봉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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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상품명 효봉 노트
정가 12,000원
판매가 10,800원
저자/출판사 효봉 스님 / 어의운하
적립금 540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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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수 207
발행일 2021-09-27
ISBN 9791196560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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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 책은 『曉峰法語集』 중 효봉 스님이 1948년 7월 15일 하안거 해제법문(해인사 가야총림)부터 1960년 1월 15일 동안거 해제법문(동화사 금당선원)까지 설하신 상당법어를 묶은 것으로, 일부 한문 표기는 가독성을 위해 뺐다. 상당법어의 날짜는 모두 음력이다. 한문본을 보고 싶은 독자는 『曉峰法語集』을 참고하기 바란다. 독자들은 법어를 읽으면서 70여 년을 거슬러 효봉 스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지식이 귀한 시대에 이 책이 선禪의 울림이 되길 바란다.
 


저자 소개
 
저자 : 효봉
 
이력
 
1888년 음력 5월 28일 평안남도 양덕군 쌍용면 출생
1900년 평양감사 개최 과거시험에 장원급제
1908년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하여 관선 유학시험 합격
1913년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 졸업 후 귀국
1914년 서울과 함흥, 평양 등에서 10년 동안 법관 생활 시작
1923년 판사를 벗어던지고 조실부모한 엿장수로 전국 방랑
1925년 엿장수로 전국을 떠돌다 금강산 신계사에서 석두 스님을 은사로 출가(38세)
1926년 용성 스님 및 수월 스님을 찾아가 운수행각雲水行脚
1927년 신계사 미륵암에서 용맹정진
1928년 신계사 보운암에서 용맹정진
1929년 금강산 여여원 선원에서 용맹정진
1930년 금강산 법기암 무문관 토굴에서 1일 1식 장좌불와 용맹정진
1931년 토굴 정진 1년 6개월 후 오도悟道(44세). 스님의 오도송은 다음과 같다.
바다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海底燕巢鹿抱卵
타는 불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 달이네火裡蛛室魚煎茶
이 집안 소식을 뉘라서 알랴 此家消息誰能識
흰 구름은 서쪽으로 달은 동쪽으로白雲西飛月東走
1932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화상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 수지
1933년 내금강 마하연 선원에서 만공 스님 회하會下에서 정진
1934년 남쪽으로 운수행각
1935년 설악산 봉정암에서 동산 스님, 청담 스님 등과 함께 하안거.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 회하에서 동안거
1936년 태백산 수암사에서 동산 스님, 혜암 스님 등과 함께 정진. 덕숭산 수덕사에서 만공 스님을 모시고 동안거
1937년 운수행각을 멈추고 조계산 송광사 삼일암에 주석. 이때 구산 스님이 효봉 스님을 은사로 삼일암에서 출가
938년 보조국사의 16세 법손인 고봉국사로부터 몽중법어夢中法語를 듣고 난 후 법명을 학눌學訥, 법호를 효봉曉峰이라 함.
1941년 재단법인 여여원如如院 이사장 취임
1946년 가야산 해인사에 가야총림을 개설하고 초대 방장으로 위촉(59세)
1950년 부산 동래 금정사에서 동안거
1951년 경남 통영 미륵산 용화사 도솔암에서 하안거
1954년 미륵산 용화사 뒤편 미래사 창건 및 주석. 종단 정화준비위원으로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주석
1955년 미래사 토굴(曉峰臺)에서 오후불식午後不食하며 정진. 이때 법정 스님이 효봉 스님을 은사로 미래사에서 출가
1956년 네팔 카트만두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 대회에한국 대표로 동산 스님, 청담 스님과 함께 참석
1957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해 종단의 종무행정을 수행. 이승만 대통령 생일 잔치에 초대되어 “본래 생사가 없는데 어디에 생일이 있겠느냐(生不生, 死不死)”는 유명한 일화를 남김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제3대 종정으로 추대. 동화사 금당선원에 주석
1960년 미래사 토굴에 주석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 추대(75세)
1963년 팔공산 동화사에 주석
1966년 밀양 표충사 서래각에 주석. 음력 9월 2일 새벽 3시 입적. 세수 79세 법납 42년. 임종게는 아래와 같다.
내가 말한 모든 법吾說一切法
그거 다 군더더기都是早??
오늘 일을 묻는가苦問今日事
달이 일천 강에 비치리月印於千江
 


목차

 

1948~1949
 
1. 1948년 7월 15일 해인사 해인총림 - 하안거 해제 법어
2. 1948년 10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 동안거 결제 법어
3. 1948년 12월 8일 해인사 가야총림 - 성도절 법어
4. 1949년 1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5. 1949년 3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6. 1949년 3월 25일 해인사 가야총림
7. 1949년 4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8. 1949년 4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 하안거 결제 법어
9. 1949년 5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10. 1949년 6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 하안거 반산림 법어
11. 1949년 6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12. 1949년 7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 하안거 해제 법어
13. 1949년 8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14. 1949년 8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15. 1949년 9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16. 1949년 9월 10일 해인사 가야총림 - 가사불사架裟佛事 회향 법어
17. 1949년 10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 동안거 결제 법어
18. 1949년 12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 동안거 반산림 법어
19. 1949년 12월 8일 해인사 가야총림 - 성도절成道節 법어
 
1950~1954
 
20. 1950년 1월 7일 해인사 가야총림 - 기신론산림起信論山林 회향 법어
21. 1950년 1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 동안거 해제 법어
22. 1950년 2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 열반재涅槃齋 법어
23. 1950년 3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24. 1950년 4월 8일 해인사 가야총림
25. 1950년 4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 하안거 결제 법어
26. 1950년 여름 해인사 가야총림 - 문성니재일文成尼齋日 법어
27. 1950년 5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28. 1953년 4월 15일 통영 용화사 토굴 - 하안거 결제 법어
29. 1953년 6월 1일 통영 용화사 토굴 - 하안거 반산림 시중示衆
30. 1954년 1월 15일 통영 용화사 토굴 - 동안거 해제 법어
31. 1954년 진주 연화사
32. 1954년 7월 24일 비구승比丘僧 대회차 상경중 선학원에서
 
1958~1960
 
33. 1958년 10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 동안거 결제 법어
34. 1958년 11월 1일 동화사 금당선원
35. 1958년 11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36. 1958년 12월 1일 동화사 금당선원 - 동안거 반산림 법어
37. 1959년 4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 하안거 결제 법어
38. 1959년 5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39. 1959년 6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40. 1959년 7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 하안거 해제 법어
41. 1959년 11월 1일 동화사 금당선원
42. 1959년 11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43. 1959년 11월 30일 동화사 금당선원
44. 1960년 1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 동안거 해제 법어
 


출판사 서평


1. 효봉 스님의 상당법어는 어떤 책인가?
 
여기에 수록된 효봉 스님의 법어 중 가야총림에서 설하신 것은 시자인 보성 스님이 초록한 것이며, 동화사에서 설하신 법어는 제자인 법흥 스님이 기록해 놓은 것으로 이 법어들은 훗날 ‘효봉문도회’에서 한글로 옮겼다. 보성 스님은 생전에 편집자와 인터뷰 중 이렇게 밝혔다.
“내가 기록하는 것이 재밌어서 그랬지. 스님께 ‘이눔의 자슥아, 아까 법문한 것을 잘 들었다가 나중에 기록할 것이지’하고 꾸지람도 많이 들었지. 그렇지만 꾸지람 들 어가면서도 기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나중에 우리에게 참고가 되겠지 하고 적은 거지.”
효봉 스님의 법어는 1975년 상당법어, 수시설법, 게문, 서장 등을 묶어 『曉峰語錄』(비매품)로 발간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됐으며, 이후 1995년 법어, 서장, 화보 등을 추가해 『曉峰法語集』으로 정식 출간했다. 효봉 스님의 법어가 대중에게 공개된 것은 무엇보다 손상좌인 현호 스님의 공이 크다. 흩어지고 숨겨져 있던 자료를 모으고 선별하는 데 가장 힘을 쏟았기에 효봉 스님의 법어가 대중과 만날 수 있었다. 아쉽게도 효봉 스님의 법어집은 십여 년 전에 절판되었다. 이에 어의운하 출판사에서 조계종 원로의원 현호 스님, 송광사 방장 현봉 스님, 송광사 주지 자공 스님, 법련사 주지 진경 스님께 효봉 스님의 상당법어 출간을 말씀드렸고, 흔쾌히 공감해주셨다.
이 책은 『曉峰法語集』 중 효봉 스님이 1948년 7월 15일 하안거 해제법문(해인사 가야총림)부터 1960년 1월 15일 동안거 해제법문(동화사 금당선원)까지 설하신 상당법어를 묶은 것으로, 일부 한문 표기는 가독성을 위해 뺐다. 상당법어의 날짜는 모두 음력이다. 한문본을 보고 싶은 독자는 『曉峰法語集』을 참고하기 바란다. 독자들은 법어를 읽으면서 70여 년을 거슬러 효봉 스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지식이 귀한 시대에 이 책이 선禪의 울림이 되길 바란다.
 
2. 효봉 스님은 누구인가?
 
효봉 스님(1888~1966)은 흔히 ‘절구통 수좌’ ‘판사 중’ ‘늦깎이 중’ 등의 수식어들이 따라다닌다. ‘절구통 수좌’는 효봉 스님이 출가 이후 참선 정진할 때, 그리고 금강산 법기암 토굴에서 1년 6개월 동안 스스로 갇힌 채 정진할 때의 모습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한번 앉으면 엉덩이 살이 헐어서 그 진물이 방석에 달라붙을 정도였는데, 이때의 모습을 환속한 제자인 시인 고은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님을 모시고 목욕을 할 때 그 궁둥이와 발가락, 발바닥에 그 고행의 자취가 역력히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판사 중’은 역설적이게 효봉 스님의 수행 이력을 감추게 하는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스님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 평양 등에서 판사를 하다, 사형 판결에 대한 깊은 회의로 판사복을 벗어던진 후 엿장수로 전국을 떠돌아 금강산 신계사로 출가한다. 이런 출가 전 행적으로 효봉 스님은 늘 ‘판사 중’이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그도 그럴 것이 ‘판사’라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를 벗어던지고 전국을 엿장수로 방랑한 후 출가했으니, 그 삶의 드라마틱함에 많은 이들이 호기심으로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효봉 스님도 출가한 날을 생일로 받아들였듯이 우리들이 효봉 스님을 선지식으로 추앙하는 것은 ‘판사 이찬형’이 아닌 ‘선사 효봉’이다.
‘늦깎이 중’은 출가 나이가 당시로는 아주 늦은 나이인 38세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효봉 스님 스스로 늦은 나이에 출가했고, 세속의 모든 것(가족, 판사직 등)을 버리고 출가했기 때문에 원력이 컸을 것이다. 1927년 여름 신계사 미륵암 선원에서는 안거에 들어갈 때 미리 이렇게 양해를 했다고 한다.
“저는 반야에 인연이 엷은 데다가 늦게 중이 되었으니 한가한 정진을 할 수 없습니다. 묵언을 하면서 입선入禪과 방선放禪, 행선行禪도 하지 않고 줄곧 앉아만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효봉 스님은 늦게 출가한 상황을 이런 물러남 없는 정진력으로 극복해 나간 것이다. 사실, 이런 이미지보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효봉 스님을 경허, 만공, 한암 등의 선사들과 함께 한국 근현대불교에서 대표 선지식으로 있게 한 효봉 스님의 선 수행이다.
효봉 스님은 출가 후 용성, 수월 선사 등을 만나 가르침을 얻고 이후 운수행각과 용맹정진을 한다. 결국 깨달음은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 아닌, 스스로 얻어야 한다는 확신으로 1년 6개월 동안 토굴에 스스로를 가둔 채 1931년 금강산 법기암 무문관 토굴에서 오도한다. 그 후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덕숭산 수덕사 등에서 만공, 한암 선사의 회하에 정진한다. 마침내 스님에게 수행의 전환점이 될 송광사 삼일선원에서 1937년부터 10년 동안 주석하며 ‘제2 정혜결사’를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1938년에는 보조국사 16대손인 고봉국사로부터 몽중법어를 듣고 난 후 법명을 학눌, 법호를 효봉이라 한다.
몽중법어는 효봉 스님의 선에 중요한 전환이 된다. 이후 효봉 스님이 자신에게 3명의 스승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그 한 명이 보조인 것은 스님이 선이 보조지눌의 선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이 산승은 상세上世에는 육조를 섬기고, 중세中世에는 조주를 섬기며, 하세下世에는 보조를 섬긴다.”(1949년 9월 1일 해인사 가야총림)
송광사 삼일선원에 주석하면서 한국불교의 젊은 인재들이 효봉 스님 회하에서 수행 정진하는데, 성철(1912~1923), 일타(1929~1999), 탄허(1913~1983) 등 젊은 인재들이 삼일선원에 모여들었다. 이런 움직임은 스님이 송광사 삼일선원을 떠나 해인사 가야총림으로 옮기는 1946년 11월까지 이어진다. 이 삼일선원 10년 동안에 많은 수좌들을 제접하고 법어를 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때의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해방 후 한국불교는 무엇보다 교단의 수행 결사 운동이 시작된다. 그 첫 시작이 해인사 가야총림 건립이었고, 교단에서는 초대 방장에 효봉 스님을 추대한다. 해방 후 교단이 왜색불교에서 벗어나 수행 교단을 위해 야심차게 추진해온 가야총림 건립과 그 첫 방장을 효봉 스님으로 추대했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그만큼 해방 이후에 한국불교의 선을 이어줄 어른이 효봉 스님이다. 효봉 스님은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당대 수좌들의 구심점이 되어 교단을 수행 교단으로 이끌어간다. 이후 효봉 스님은 통영 용화사, 미래사 등에서 제자들과 함께 철저히 수행중심으로 살았다. 1955년 효봉의 권속으로 들어온 시인 고은은 통영 시절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미래사 대중들은 백장청규百丈淸規를 지켜 하루에 먹을 것을 짓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원칙을 거의 일상으로 삼아 밭을 일구고 감자를 심고 이것저것 채마와 고소까지 심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교단은 왜색불교를 없애기 위한 정화운동으로 소용돌이친다. 이미 교단의 수행에 중심이 된 효봉 스님은 이런 정화운동에 청담, 동산 스님의 요청으로 참여하게 된다. 당시 정화운동에서 비구측에서는 강경론과 온건론으로 나눠지는 입장이었다. 강경론은 이번 차제에 비구승 교단을 완전히 확립하자는 입장이었고, 온건론은 비구승 숫자가 적고 사판에 능하지 못하니 일부 사찰만 양도받아서 점진적으로 강화하자는 입장이었다. 효봉 스님은 온건론의 입장이었는데, 효봉 스님의 온건론에는 비구가 종권을 갖는 것보다 도제 양성을 위한 물적 토대를 제공할 사찰이 필요했다는 입장으로 정화운동에 투신했다는 견해가 있다.(지원 스님 박사논문) 정화운동 이후 효봉 스님은 한국불교의 가장 큰 어른으로 상징되는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 초대 종정에 오르게 된다.
효봉 스님은 일제 식민지 시절과 해방 그리고 한국전쟁과 정화운동 등 근현대 한국불교의 격동기를 통과한 전통 선 수행자이다. 개인으로는 보조지눌의 정혜쌍수라는 전통 선을 이어온 수행자이지만, 한편으로 가야총림 초대 방장, 정화운동의 참여, ‘통합종단 초대 종정’이라는 한국불교에 부여된 새로운 활로 모색에 그 책임을 부여받지 않을 수 없었다. 종정 추대 이후 동화사 금당선원에 주석하며 선지를 펼쳤고, 1966년 밀양 표충사에서 세수 79세 법납 42년에 입적했다.
 
3. 효봉 스님은 제자들에게 어떤 법어를 했는가?
 
이 책에 실린 효봉 스님의 상당법어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설한 법어 27편,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설한 12편, 그리고 통영, 진주, 서울 등에서 설한 5편 등 총 44편이다. 효봉 스님이 가야총림 방장에 위촉된 때가 1946년 11월이기에 실질적으로 법어를 시작한 것은 1947년부터로 추측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상당법어는 1948년 7월 15일 하안거 해제 법문부터다.
상당법어는 법당 중앙의 법좌에 올라 거행하는 설법으로 주로 초하루, 보름, 입제, 해제 등 특별한 날에 이루어진다. 이 책에 실린 효봉 스님의 법어는 대부분 참선하는 비구와 비구니에게 교학을 설명하기보다 선지식으로서 선지를 드러내고 제접하는 목적이란 것을 이해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 그 형식은 선지를 펼치고, 게송으로 마무리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는 전통적 선지식의 법어인 것을 알 수 있다.
효봉 스님의 법어를 보면 크게 약 여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가장 많은 법어는 안거의 결제와 해제 법어다. 그리고 성도절, 열반절 법어를 통해 효봉 스님의 부처님에 대한 견해를 엿볼 수 있다. 또한 법어의 내용에서는 조사어록과 경전을 많이 인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황벽의 전심법요, 완릉록, 선문염송설화, 금강경, 화엄경, 대승기신론 등의 내용이 법어에 많이 들어 있다.(이 점은 지원 스님의 박사 학위 논문 ‘효봉 원명의 선사상 연구’에서 분석했다.)
 
1) 하안거 동안거 결제 법어
효봉 스님은 대중과 안거를 하며, 당신 스스로 함께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예컨대 1948년 10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의 동안거 결제 법어 중 이런 말씀을 한다.
“이번 겨울 안거 동안에 이 산승은 여러 대중과 함께 한배를 타고 물결 일지 않는 바다를 건너 바로 피안으로 건너가리니, 대중은 맹세코 다시는 진흙을 묻혀 물에 들어가지 말고 나와 같이 가자.”
더불어 제자들에게 출가의 초심을 강조하며, 제자들에게 출가의 길을 스스로 엄중하게 묻게 한다.
“출가한 대중은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의식衣食을 구하려 하는가, 명리名利를 구하려 하는가, 재색財色을 구하려 하는가? 그 모두가 아니라면 그럼 무엇을 구하려 하는가? 오직 한 가지 일(一件事)이 있으니 이제 내가 그대들을 위해 말하리라. 자기 한 몸만을 위해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으며 계율을 지키고 아란야(阿蘭若:寂靜處)에 살면서 해탈을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참 출가出家라 할 수 없다.” (1949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 법어 중)
또한 효봉 스님은 깨달음에는 출재가가 없으며, 깨달음과 합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만약 이 일을 말한다면 남녀男女와 노소老少도 없고 출가出家와 재가在家도 없으며 구참舊參과 신참新參도 없고, 다만 그 당자(當人)의 결정적인 신심이 확고부동한 데에 있을 뿐이다. 대개 출가한 사람(出家人)이라도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과 합하면 마군魔軍이 불당佛堂에 있는 것이요, 재가의 사람(在家人)이라도 깨달음과 합하고 티끌을 등지면 부처가 속가俗家에 있는 것이다.”(1953년 4월 15일 하안거 결제 법어 중)
 
2) 하안거 동안거 해제 법어
효봉 스님은 해제 법어에서는 해제 후 수좌에게 필요한 당부와 경책을 한다. 효봉 스님이 제자들을 아끼는 마음이 드러난다. 때론 강하게 때론 부드럽게 지도하는 스승의 모습이 보여진다. 또한 출가자와 재가자를 같은 석가여래이 제자로 보고 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결제結制 당시에 이르기를 금불金佛은 용광로에 견뎌내지 못하고, 목불木佛은 불에 견뎌내지 못하며, 토불土佛은 물에 견뎌내지 못한다 했다. 용광로에 들어가도 녹지 않고 불어 들어가도 타지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풀리지 않는 불상佛像을 이번 여름 안거 구십 일 동안에 각자 조성造成했으리라 믿는다.”(1949년 7월 15일)
“만일 흑산黑山 밑의 귀굴鬼窟 속에 앉아 화두話頭를 들어 깨달았다고 자칭한다면, 그런 선객禪客들은 효봉曉峰의 제자(門下人)가 아니요 바로 송장을 지키는 귀자鬼子일 뿐이니라.”(1950년 1월 15일)
“지옥地獄의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가사를 입고도 큰일(大事)을 밝히지 못한 채 사람의 몸을 잃어버리는 그것이 고통 중의 고통이다. 내가 본래 이곳에 온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그것은 명예를 위해서도 아니며 의식을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이 가운데 사람을 얻기 위해서이니 금년 안에 하나나 반이라도 얻는다면 여기 모인 대중과 이곳에서 목숨을 마치겠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면 여러분을 버리고 푸른 구름과 함께 떠나가리라.” (1950년 1월 15일)
“출가대중出家大衆과 재가대중在家大衆이 다 같은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제자로서, 작년 10월 15일에 여기서 삼보三寶의 증명으로 겨울 안거를 결제結制한 것은 무엇을 위해서였던가. 그것은 다만 생사대사生死大事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오늘 해제解制하는 날을 맞아 무슨 소득이 있는가? 어떤 소득이 있다면 대중은 각자 말해 보라.”(1954년 1월 15일)
“대중에게 묻겠다. 여기 모인 대중 가운데 수사자가 낳은 새끼를 보았느냐? 본 사람이 있거든 나와서 일러라.”(1960년 1월 15일)
“그대들은 밥도둑이 아닌가. 두 도둑이 집안의 보배를 훔쳐 가려고 하니 취모검吹毛劍으로 육문六門을 지키되 용감하기 적병敵兵을 대하듯 해야 한다. 적을 막지 못하면 저들로부터 내 자신이 피해를 입을텐데 어찌하여 스스로 방일放逸한고. 졸음과 망상 두 마구니가 침입하지 않던가? 남의 시은施恩을 지고 그 은혜를 갚았는가? 그림의 떡이 능히 배부르게 하던가? 범부가 성인되려고 하는데 누가 막던가? 삼도三途의 괴로움이 그대의 집인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닦지 않는가.”(1959년 7월 15일)
 
3) 성도절 열반재 법어
부처님의 깨달음이 무엇인지 직접 대중에게 묻기도 하며, 선의 입장에서 부처님의 열반을 표현하기도 한다.
“공연히 무슨 마음을 내어 저 설산雪山에 들어가 6년 동안 잠자코 앉아 무슨 일을 하였던고. 오늘 밤 샛별 보고 도를 깨쳤다 하였지만 도란 무슨 물건이며 깨침이란 또 무엇인가.”(1948년 12월 8일 해인사 가야총림 성도절 법문)
“내 일찍 듣건데 우리 부처님 세존께서는 임오년壬午年 12월 8일(臘月八日) 새벽에 샛별을 보고 도를 깨치실 때, 이 대지의 중생들과 함께 정각正覺을 이루셨다 한다. 석가 노인은 그만두고 여기 모인 대중은 그 정각 이룬 것을 과연 알고 있는가? 만일 알고 있다면 각각 한 마디씩 말해 보라.”(1949년 12월 8일 해인사 가야총림 성도절 법문)
“우리 부처님 세존께서 지금부터 2899년 전 임신년壬申年 2월 15일, 열반회상涅槃會上에서 손으로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대중에게 고하시기를 ‘그대들은 내 자마금색紫磨金色의 몸을 잘 보고 우러러봄으로써 만족하여 다시는 후회하지 말라. 만일 나를 멸도滅度했다 하더라도 그는 내 제자가 아니며, 나를 멸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내 제자가 아니다’라고 하셨다. 그러면 지금 대중에게 묻노니, 어떻게 해야 부처님의 제자(佛弟子)가 되겠는가? 이 말끝에 머리를 돌리지 못하면 그는 부처님의 적자嫡子는 고사하고 서자庶子도 되지 못할 것이다.”(1950년 2월 15일 해인사 가야총림 열반재 법문)
 
4) 기신론산림 회향 법어, 문성니 재일 법어
해인사 가야총림에서 대중들과 대승기신론을 연찬한 것을 알 수 있는 법문이다. 역시 효봉 스님은 대중에게 계속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특이하게 비구 영가를 위한 법문을 하였다.
“지금 여러 대중은 한 마음 한 정성(同心同誠)으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산림을 다 마쳤다. 그러면 거기서 마명대사馬鳴大士를 친견하였는가? 마명대사를 참으로 친견하려면 모름지기 문자文字 밖을 향해 눈을 돌려야 한다. ... 문자文字가 있는 『대승기신론』의 논주論主는 마명대사이지만 문자 없는 대승기신론의 논주는 누구인고? 다시 묻노니 이 『대승기신론』이 말세 중생의 신근信根을 키웠는가, 혹은 말세 중생의 신근을 끊었는가?”(1950년 1월 7일)
“문성文成 영가여, 위에서 말한 법문法門을 알겠는가? 알 수 있다면 천당天堂과 불찰佛刹을 마음대로 소요할 수 있겠지만 혹 그렇지 못하거든 이 산승山僧의 말후末後의 게송을 들으라.”(1950년 여름 해인사 가야총림)
 
5) 계정혜 삼학
효봉 스님이 구체적 예를 들어서 법을 설명한 법문 중 가장 두드러진 내용이 바로 ‘계정혜 삼학’이다. 당시 효봉 스님은 선지식 중 누구보다 계율을 강조한 선지식이다.
“이 문門이란 계율·선정·지혜의 삼학三學을 가리킴이다. 이 삼학三學은 마치 집을 는 것과 같으니 계율은 집터와 같고, 선정은 재목과 같으며, 지혜는 집 짓는 기술과 같다. 아무리 기술이 있더라도 재목이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고, 또 재목이 있더라도 터가 없으면 집을 지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삼학三學을 하나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이 삼학을 함께 닦아 쉬지 않으면 마침내 정각正覺을 이루게 될 것이다. 우리 형제들이 이미 발심하여 공문空門에 들어왔다면, 세상 인연을 아주 끊고 불조佛祖의 가르침에 의해 이 삼학을 부지런히 닦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부하는 사람은 각각 저울을 가지고 날마다 닦는 공부의 그 무게를 검토할 때에 반야의 힘(般若力)과 무명의 힘(無明力)을 자세히 저울질해 보아야 할 것이다.”(1954년 7월 24일 선학원)
“계戒가 없이 혜慧만 닦으면 건혜乾慧이므로 생사生死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戒ㆍ정定ㆍ혜慧 삼학三學은 고불古佛 고조高祖의 출입문이므로 이 길이 아니면 외도법外道法이다. 또 정중定中에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사람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것이고, 정력定力이 없으면 화두가 자주 끊어진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아난존자阿難尊者에게 말씀하시기를, ‘백년 동안 혜慧를 배우는 것이 하루 동안 정定을 익히는 것만 못하다(百年學慧 不如一日習定)’고 하셨으니, 부처님 말씀을 믿지 않고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1958년 12월 1일 동화사 금당선원)
 
6) 경책과 친절의 법어
 
효봉 스님은 제자들에게 적지 않은 경책을 한다. 더불어 경책에 머물지 않고, 선지식으로서 제자들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 것인지 제시한다.
“참선參禪할 때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눈 감고 앉아 있는 것은 귀신鬼神 굴 속에 앉아 귀신 꿈을 꾸는 것이다. 일어날 때는 갑자기 일어나지 말고 몸을 서서히 흔들어 조신調身한 후에 일어나고, 얼마동안 경행經行할지라도 정력定力을 잊지 말 것이며, 다시 앉을 때에는 고요히 앉으면 정력定力이 여전하여 동정動靜이 한결같을 것이다. 오는 섣달 그믐날을 기약하고 밤이나 낮이나 애를 써서 정진精進하라.”(1958년 11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슬프다. 오늘날 말세에 이른바 선禪을 공부한다는 무리들은 모든 소리와 빛깔에 집착하면서 왜 자신의 그 마음을 허공처럼 비우지 못하는가. 생사生死를 벗어나려 한다면 그 마음이 마른 나무나 돌멩이와 같고 불 꺼진 찬 재와 같아야 비로소 조금 상응相應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할 때는 다른 날 저 염라 늙은이의 철퇴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가사袈裟를 입고서도 사람의 몸을 잃는다면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 한 가닥 활로活路를 그대 위해 열었나니 더디면 더딘 대로 빠르면 빠른 대로 마음대로 오가거라 해 저물어 혹 머무를 곳 없어지면 문득 밝은 달을 만나 티끌 속을 벗어나리.”(1949년 5월 15일)
“내가 법문 할 때마다 한 마디 던지는 것은 대중 가운데 일척안(一隻眼 : 뛰어난 안목)을 갖춘 이가 있는가 해서다. 확실한 증처證處대로 답하고 장난삼아 함부로 답하지 말라.” (1958년 11월 15일 동화사 금당선원)
“산승山僧은 명리名利를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하러 왔는가. 다만 그 사람을 얻기 위해서이다. 여기 모인 대중 가운데 주장자를 가로 메고는 풀을 헤치고 바람을 거스르면서 동서남북을 마음대로 행각行脚하고 돌아다니는 납자가 있으면 말해 보라. 과연 본래의 전지(本來田地)를 밟아 보았는가. 만일 그러지 못했다면 헛되이 살다가 허망히 죽는 것이다. 대개 사문沙門 석자釋子는 있는 것도 없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니, 어디로 가든지 범성凡聖과 평등하고 해박解縛과 평등해야 비로소 조금 상응相應이 있을 것이다.”(1949년 9월 1일)
“이 산승의 법량法量은 그분들에 비해 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친절’이란 두 자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손색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대중이 법을 물을 때에는 반드시 친절해야 하는 것이니, 그래야만 그 대답도 또한 친절할 것이다. 실답게 참구하고 실답게 깨치어라.”(1949년 9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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