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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나바 바라티의 숭고미의 미학 - 그 <미적 경험>, 차맛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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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상품명 아비나바 바라티의 숭고미의 미학 - 그 <미적 경험>, 차맛카라!
정가 16,000원
판매가 14,400원
저자/출판사 김은재 / 지혜의나무
적립금 720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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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수 324
발행일 2023-08-17
ISBN 979118506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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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우리는 〈아름다운 것〉에 끌린다.
왜 그런가?
美學을 넘어 味學으로

철학과 종교의 경계(境界)가 무엇인가?
“경계”라는 것이 실제로 있기나 한 것인가?

숭고미(崇高美)가 “인간의 보통 이해력으로는 알 수 없는 경이(驚異), 외경(畏敬), 위대(偉大)함 등의 느낌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종교의 저 “성(聖)스러움”일 수도 있다.
그래서 미학(美學)이라는 취미(趣味)의 맛(味)에다 이 『숭고미의 미학(味學)』의 맛(味)과 〈성스러움의 의미(意味)〉의 맛(味)을 더한다면……




저자소개


저자 : 김은재

현직 의료인으로, 구도자로 살아가고 있다.
저서로 〈가시를 빼기 위한 가시 -『비갸나 바이라바』〉, 〈수행경 -『쉬바 수트라』〉, 〈스판다와 재인식의 -『소와 참나 이야기』〉, 〈아는 자를 아는 일 -『프라탸비갸 흐리다얌』〉, 〈참 나를 느끼는 -『스판다 카리카』〉, 〈삼위일체경 -『파라 트리쉬카』〉, 〈전체성 -『뱀과 얼나 이야기』〉, 〈탄트라 알로카의 정수 -『탄트라 사라』〉등이 있다.




목차


들어가며 · 6

제 1 장 숭고미(崇高美)의 뜻맛 · 13
1. 온몸은 아름다움을 찾고
2. 서양 미학의 정원에서

제 2 장 이상(理想)을 향한 예술 · 63
1. 〈봉인(封印)된 시간〉
2. 소리(音) 미학
3. 나탸 샤스트라

제 3 장 등장인물들 · 103
1. 단딘과 밧타 롤라타
2. 샹쿠카
3. 밧타 나야카
4. 아난다바르다나 - 〈인도 시학(詩學)〉
5. 아비나바굽타

제 4 장 연극론 〈아비나바 바라티〉 · 163
1. 밧타 롤라타 등의 견해
2. 샹쿠카의 〈롤라타 비평〉
3. 아비나바굽타의 〈재-산출 비평〉
4. 다른 이론들
5. 밧다 나야카의 견해

제 5 장 라사, 〈인식 혹은 “참맛”〉 · 213
1. 〈올바른 생각〉 곧 정견(正見)
2. 라사 실현의 장애물
3. 라사의 본질

제 6 장 더 읽을거리 · 273
1. 나탸 샤스트라 1:107의 주석
2. 드바니-알로카 1:18의 주석
3. 드바니-알로카 2:4의 주석
4. 『성스러움의 의미』 발췌

나가며 · 312




책 속으로


우리는 누구나 〈아름다운 것〉을 보면 감탄하고 이끌린다. 어떤 이는 〈아름다운 얼굴과 몸〉을 보고, 어떤 이는 〈아름다운 행동과 한 편의 드라마 같은 행위〉를 보고, 또 어떤 이는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광〉을 보고, 어떤 이는 〈아름다운 시나 황홀한 음악〉을 듣고서, 또 어떤 이는……
우리는 모두 〈(나름의) 아름다운 것들〉에 끌린다. 우리의 시선은 그쪽을 향하고, 〈더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우리 눈의 동공(瞳孔)은 무의식적으로 더 열리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들떠서 그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어쩌면 우리 자신도 잘 알아채지 못하는 〈인간 정신 요소〉의 이상(理想)인 진선미(眞善美)의 무의식적인 추구에서 나온 어떤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신비가들의 황홀경인 “삿-칫-아난다” 즉 〈존재(存在)-의식(意識)-지복(至福)〉이라는 그 어떤 것의 “맛(味, 라사)”일지도 모른다.


〈궁극의 실재〉를 향한 우리의 〈궁극적 관심〉인 종교를, 만약 종교학자 루돌프 옷토처럼, 이렇게 정의한다면……

“Mysterium tremendum et fascinans!”
“두렵고도 매혹적(魅惑的)인 신비(神秘)!”

〈그것〉은 저 미학자(美學者) 에드먼드 버크의 책 『A Philosophical Enquiry into the Origin of Our Ideas of the Sublime and Beautiful』 즉 〈숭고(崇高)와 아름다움(美)이라는 우리의 관념의 기원(起源)에 대한 철학적(哲學的) 탐구〉라는 제목처럼 미학(美學)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철학적(Philo-sophical) 탐구”는 당연히 〈진리(眞理, 실재)에 대한, 우리의 진지하고 줄기찬 사랑(善美)〉이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미(美)의 역사〉는 처음에 고대 그리스의 이상적인 미를 다루면서 이런 말로 시작한다. 미(美)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유명한 델피의 신탁(神託)은 이렇게 선언한다고 전한다.
“가장 올바른 것이 가장 아름답다!”

필자는 이 〈신탁(신의 말씀)〉을 따라 〈아름다운 것〉과 〈가장 아름다운 것〉, 그리고 〈올바른 것〉과 〈가장 올바른 것〉을 찾아보려고 한다.

필자는 미학자가 전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그렇게 읽으려들지 말길. 필자는 미학을 잘 모른다. 그러나 아름다운 것과 올바른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만큼은……
어쨌든 미학과 문학, 예술을 끌어다 쓸 것이다. 그들 역시도 분명 아름답고 올바르고 숭고한 것을 느끼고 추구했을 터. 그렇지만 이 책은 〈미학(美學) 서적〉이 아니다, 그래서 미학(味學)이라고 했다.

일찍이 저 탄트라 알로카를 쓴 아비나바굽타는 후에 아비나바 바라티라는 책도 썼는데, 바라타의 〈나탸 샤스트라〉에 대한 주석이라고 한다.
그리고 현대에 와서 탄트라 알로카를 번역했던 라니에로 뇰리(Raniero Gnoli)는 1956년 - 필자가 태어난 해다. - 〈아비나바굽타에 따른 미적 경험〉이라는 작고 아름다운 책을 썼는데, 바로 아비나바 바라티를 따른 것이다.
그리고 또 이 책은 뇰리의 그 책을 따른 것이고.
“가장 올바른 것이 가장 아름답다!”

올바른 것을 찾아 아름다운 것을 맛보려는 일에 무슨 시비가…… 일찍이 아비나바굽타는 말했다.

“만약 내가 잇차(맛보려는 ‘입맛’)를 갖지 않으면 지식(맛보아 아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어떤 것이 나타났을 때, 그쪽으로 향하지 않는 것은 그것을 피하는 것이다. (선뜻) 향하는 일은 (이전에, 아니면 전생에 가졌던) 아난다(기쁨의 맛)의 경험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그것이 사람이 자신이 싫어하거나 모르는 것 쪽으로는 잘 나아가지 않는 이유다.”

그러니 혹 행운(복)이 있으면, 아니면 혹 인연이 있으면, 아니면 혹 하늘의 뜻이 있다면……, 우리는 성경이 권하는 그 유명한 것을 맛볼지도 모른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여기의 여호와는, 물론, 소위 이 현실의 교회나 시원찮은 신학자들이 말하는 그런 것이 전혀, 전혀 아니다. 이것은 필자가 피를 토하며 밝히려고 하고, 드러내려고 하는 무엇이다.

여호와는 야훼 즉 〈있는 (이) 무엇〉이다. 한자로 실재, 현존이다. 참나, 얼나다. 〈모든 것(전체성)〉 아니면 〈하나님(一者性)〉이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그것에게는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맛본” 인간들은 분명히 있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성경의 용어로는 〈성령 받은 자〉, 불교의 용어로는 〈깨달은 자(붓다)〉, 트리카 용어로는 〈은혜를 베푸는 존재(쉬바)〉 등으로 부를지도 모른다.

이 책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내가 바로 그런 무엇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또 안내하기 위해서다. 굳이 말하면 주로 샥토파야가 이끌어가는……
그러므로 플라톤의 〈향연(饗宴, Symposium)〉에 나오는 저 현명한 무녀(巫女, 여선지자) 디오티마의 말대로 차근차근히 할 일이다. 아름다움과 숭고를 “느끼는” 일은 우뇌(右腦)의 것으로, 이른바 감정의 일이지만, 샥토파야는 좌뇌(左腦)의 것, 지성(이성, 언어)의 일이기 때문이다!
(좌뇌와 우뇌에 관한 것은, 바로 나의 뇌에 관한 것인 만큼, 비갸나 바이라바의 〈나가며〉 부분 등을 참고하라.)
이 책을 꾸미며 참고한 책과 또 읽어야 할 책을 몇 권 소개한다.

1. 『The Aesthetic Experience According to
Abhinavagupta』
- 아비나바굽타에 따른 〈미적 경험〉 - 라니에로 뇰리, 2015

2. 『The Naṭya-śāstra(나탸 샤스트라)』
- A treatise on Hindu Dramaturgy and
Histrionics(인도 극작법과 연극의 연구) - Manomohan Ghosh 역(譯), 1951

3. 『미(美)의 역사』
움베르토 에코, 2017

4. 『앙겔루스 노부스』
- 탈근대의 관점으로 다시 읽는 미학사 - 진중권, 2017

5. 『인도(印度) 음악(音樂)』- 윤혜진, 2009


“숭고(崇高)”라는 한자어는 〈높을 숭, 높을 고〉로 “뜻이 높고 고상(高尙)하다”는 뜻이고,
숭고미는 “숭고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움”으로,
철학에서는 〈미적 범주의 하나〉로, “자연을 인식하는 ‘나’가 자연의 조화를 현실에서 추구하고 실현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미의식(美意識)이 나타난다. 〈인간의 보통 이해력으로는 알 수 없는 경이(驚異), 외경(畏敬), 위대(偉大)함 등의 느낌〉을 준다.”고 국어사전은 말한다.

철학과 종교의 경계(境界)가 무엇인가?
“경계”라는 것이 실제로 있기나 한 것인가?

숭고미(崇高美)가 “인간의 보통 이해력으로는 알 수 없는 경이(驚異), 외경(畏敬), 위대(偉大)함 등의 느낌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종교의 저 “성(聖)스러움”일 수도 있다.
그래서 미학(美學)이라는 취미(趣味)의 맛(味)에다 이 『숭고미의 미학(味學)』의 맛(味)과 〈성스러움의 의미(意味)〉의 맛(味)을 더한다면……

6. 『성스러움의 의미(意味)』- 루돌프 옷토 지음, 길희성 옮김, 2021


■ 본문 중에서 - 136쪽~143쪽까지

아비나바굽타는 10세기 후반 카시미르에서 일명 추쿨라로 알려진 나라싱하굽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난다바르다나의 〈드바니-알로카〉를 제외하고는, 밧타 롤라타, 샹쿠카, 밧타 나야카 등의 이론들은 그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졌다. 미학 분야에서 그의 작품은 두 가지로, 나탸 샤스트라의 주석인 〈아비나바 바라티〉와 드바니-알로카의 주석인 〈드바니-알로카 로차나〉이다. 시학에서 그의 스승인 밧타 토타의 카뱌카우투카에 대한 주석은 지금은 없고, 카뱌카우투카 책 자체도 전해지지 않는다. 드바니-알로카 로차나는 드바니 학파에서는 아주 중요한 작품으로 그 발전에 공헌했다.

아비나바굽타는 나야카의 미적 개념의 핵심인, 〈보편화의 개념〉은 받아들이나, 〈미적 경험이 지식보다는 성과라는 개념〉과 〈시적인 말이 계시의 힘이라는 추정 개념〉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비나바굽타의 견해에서 드바니와 라사 학파는 떼어놓을 수 없게 용해되어 있고, 아난다바르다나가 말하지 않지만, 라사는 암시로 나타난다. 〈미적인 맛보는 일〉은 모든 것과는 다른 〈순수한 인식〉일 뿐이다.
“라사”는 독특하다.¹ 〈영구적 정신상태(감정)〉에 상응하는 아홉 가지 라사의 구분은 오직 ‘경험적’일 때만 - 오직 ‘인식’일 때만 - 가치를 갖는다.²

✍ ¹ 아비나바 바라티에서 그는 〈모든 라사는 “하나의 거대한 라사”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² 아난다바르다나와 아비나바굽타는 아홉 번째 〈영구적 정신상태〉와 라사를 받아들인다. 

그는 말한다.
“우리는 〈즐겨지는 그 무엇〉은 지복으로 가득한 〈의식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무슨 고통의 의심(느낌)이 있겠는가? 우리의 영(靈) 깊은 곳에 있는 기쁨, 슬픔 등의 그 감정들은, 그것에 변화를 주기 위해, 오직 한 가지 기능만을 가진다. 재현의 기능은 그것들을 깨우는 것이다.”

또 앞에서도 인용하였듯이 “〈미적 경험〉은 마치 마술로 생겨나는 꽃처럼, 그 핵심은, 오로지 ‘현재’이다. 그것은 〈이전에 온 무엇〉과도 〈이후에 오는 무엇〉과도 관련이 없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밧타 나야카가 말하는 〈보편성의 상태〉는 〈시공간을 구분하는 일을 없애는 것〉뿐 아니라 〈어떤 특별한, 아는 주체를 암시하는 것〉이다. 밧타 롤라타의 질문, 즉 라사가 어디에 있는가, 〈배우에게 있는가, 재현된 인물에게 있는가〉는 아비나바굽타에게는 터무니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라사는 배우 안에 있지 않다. 그러면 어디에? 그대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내 (이미 말했던 것을) 다시 떠올리리라. 진실로, 라사는 시간과 공간, ‘아는 주체’의 차이에도 제한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그대의 의심은 의미가 없다.
그러면 배우는 무엇인가? 배우는 〈맛보는 일의 수단〉이다. 그래서 ‘그릇’이라고 부른다. 포도주의 맛은 맛보는 데 필요한 수단일 뿐인 그릇에 머물지 않는다. 그러므로 배우는 단지 처음에만 유용하고 필요하다.”

이 〈개개의 아는 주체들을 제거하는 일〉은, 즉 〈서로가 다른 “실용적인” 관객들의 그 인격을 제거하는 일〉은 〈유일하고, “보편화된”, 시공간 등 어떤 결정에 둘러싸이지 않는 아는 주체〉, 의식(意識)의 상태로 이어진다. 이 개념은 아비나바굽타가 속한 철학파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¹ 잘 아는 대로 여러 “에고(나)” 사이의 차이는 환영(幻影)이다. 실제로 “나” 즉 의식만이 유일(唯一)하다.
✍ ¹ 이런 이유가 이 미학(味學)이란 미학(美學)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다. 그리고 전에 소와 참나 이야기에서도 고백했지만, 필자는 작가도, 시인도, 예술가도 전혀, 전혀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쪽의 전문용어는 더더욱 잘 알지 못한다. 

불교의 유식학파(唯識學派, 비갸나-바다)에서는 실재(實在)는 의식(意識)이지만 여러 개체성 혹은 “정신적 연속성(삼타나, 相續)”은 서로가 다르다고 하는데, 〈한 사물은 똑같은 시간, 공간에서 그것을 보는 많은 주체들에게 똑같은 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에서는 샤이바 철학과 분명히 모순된다.
다른 말로, 똑같은 사물을 보는 둘 이상의 주체(관객)는 〈똑같은 정신적 조건〉에 있다. 즉 그들은 〈단일한 아는 주체〉를 형성한다.¹ 웃팔라데바는 말한다.
“다수의 주체가 주어진 한 사물(항아리)을 똑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알아채고 있다. 그때 이 사물에 대해, 그들은 단일성(單一性)을 형성하고 있다.”

✍ “의식(意識)”이란 하늘은 나누어져 있지 않다. 그 하늘을 떠도는 “생각의 구름”이 나누어져 있다.
〈이런 것〉을 경험한 이들이 이른바 전등(傳燈)을 하고 또 교회(에클레시아)로 모였던 것이다. 
물론 이 단일성의 상태는 영구적이지 않다. 어떤 지점에서, 〈(유일한) “나”를 이루었던, 제한된 여러 “나(에고)들”〉은 다시 그들 자신으로 흩어진다. 이 연합과 분리에 책임 있는 요소는 주(主) 즉 의식의 절대 자유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 단일성의 상태는 여러 가지로 일상생활에서도 일어나는데, 축제(祝祭)를 즐길 때나 종교적 의식(儀式)에서는 분명하다.¹ 그런 때는 모두가 다함께 축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모임에서는 〈어떤 한 사람의 자아〉와 〈다른 사람들의 자아〉의 구별은² 그 의식 동안은 존재하기를 멈추고, 그들 너머로, 어떤 〈정신적 단일성〉, 정확하게 〈선행하는 분리된 개체성보다 더 강력하고 유일한 어떤 주체〉가 실현된다.

✍ ¹ 뱀과 얼나 이야기와 탄트라 사라에서 쿨라-야가로 다루었다.
² 몸과 마음 등이 다른 것 때문이다. 

아비나바굽타는 탄트라 알로카(28:373-79)에서 말한다.
“의식(意識)은 모든 것을 구성하고 활성화하는데, 몸이 다른 것 때문에 〈수축의 상태〉로 들어간다. 그러나 대중적인 축제에서 그것은 〈확장의 상태〉로 돌아간다. - 모든 구성원이 서로 안에서 반영되기 때문이다. 축제의 분출로 (얼굴에 나타나는) 의식의 빛남은 (저절로 쏟아내는 경향으로) 마치 많은 거울처럼, 동참한 모든 사람의 의식에 반영된다.
이것으로 흥분되어(in-flamed, 그 불길 안에서) 어떤 노력도 없이 개인의 수축된 상태는 파기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춤, 가수의 공연 등 많은 사람의 모임에서 모든 구경꾼이 그 광경과 동일시될 때, 가득 찬 기쁨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 분리된 것으로 여겨지던 의식은 본래가 지복으로 되어 있어, 이런 환경에서 〈단일성의 상태〉를 얻어 〈완전하고 완벽한 지복의 상태〉로 들어간다. 질투, 부러움 등 위축이 되는 원인이 없기 때문에, 이런 환경에서 의식은 장애물이 없는 확장의 상태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지복에 의해 편재(遍在)하게 된다.
반면에 참가자 중 하나라도 바라보는 그 광경에 집중하지 못할 때, 다른 관객들이 용해되어 있는 의식의 형태를 나누어 가질 수 없고, 마치 〈고르지 못한 물건의 표면에는 잘 닿지 못하는 것처럼〉 이 의식은 방해를 받는다.
이것이 탄트라에서 쿨라-야가 등의 축제에서 〈그 축제와 동일시되지 못해 축제하는 이들의 의식의 상태를 나눠가질 수 없는 이〉는 입장이 허용되지 않는 이유다. 실제로 이런 것은 다른 이의 의식의 수축도 일으킬 것이다.¹”

✍ ¹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 상태의 모임〉에서도 〈그런 이유로〉 분위기가 깨지는 것은 자주 경험하는 일이다. 그래서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 하는가? 주역(周易)은 충고한다.

方以類聚 物以群分(방이유취 물이군분)

“(영적 수준이) 다른 곳에는 사는 무리도 달라
각기 〈다른 세계(천국, 지옥 등)〉를 이루나니” 

이것은 다시 어떤 문제에 놓이는데, 미적 경험과 신비적 경험의 관계다. 밧타 나야카는 그것을 같은 것으로 보았으나 아비나바굽타는 나야카의 견해를 수용하면서도 신비적 의식의 상태를 미적 의식의 상태와 분리하는 경계선을 명확히 한다.
그는 종교적 경험이란 〈모든 극단이 완전히 사라지는 일〉, 〈신(神, 의식)의 용해하는 그 불 속으로 모든 이분법적인 것들의 용해〉라고 말한다. 해와 달, 낮과 밤, 선과 악은 의식의 맹렬한 불길 속에 타버린다. “나”와 “내 것”이라는 매듭(결절)은 그 안에서 완전히 해체된다. 그리고 요기는 이분법적 사고 저 너머로, 그의 의식의 단단한 독존(獨存) 즉 카이발야에 분리되어(즉, 거룩하게) 남는다.

그러나 〈미적 경험〉에서는 일상생활의 감정들과 요소들은 그것들이 변형되더라도 항상 현존한다. 하지만 미적 경험은, 일상의 의식과 구별되는 고유하고 환원될 수 없는 성격 때문에, 산만한 질서의 것은 아니다.
반면에 〈미적 의식〉은 내용에 있어서는, 〈모든 개인적 관계에서 자유로운, 즉 정화(카타르시스)된 일상생활〉일 뿐이고, 다른 형태의 이분법적 의식과 전혀 다르지 않다.
예술은 삶(생활)의 부재가 아니라 - 삶의 모든 요소는 미적 경험으로 나타난다. - 〈모든 열정에서 진정되고 또 분리된 삶 그 자체〉이다.


■ 본문 중에서 - 199쪽~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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