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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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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상품명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정가 24,500원
판매가 품절
저자/출판사 김태준, 이승수, 김일환/푸른역사
적립금 1,100원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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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수 559
발행일 2005-09-30
ISBN 9788991510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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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연행’은 연경행燕京行의 줄임말로 외교를 목적으로 중국에 건너간 중국 사행을 통칭하는 말이다. 명나라 시대에 중국 사행은 천자에게 조회하러 간다는 뜻인 ‘조천朝天’이라 했다. 그러나 명이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진 후에 오랑캐를 떠받드는 말을 사용할 수 없어 가치판단이 배제된 ‘연행’이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이다. 연행은 한국과 중국을 잇는 큰 길이었고, 조선의 정체성을 구성했던 결정적인 요소이며, 우리가 조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키워드가 된다.

이 책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저자들을 비롯한 여러 사학자들이 2003년부터 2005년에 걸쳐 몇 차례의 연행로 답사를 정리한 것이다. 연행길에 나선 조선지식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연행로를 재구성하고, 그들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고민들이 현재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

책 속으로

우리에게 중국은 매우 친숙한 존재이면서 아직도 막연한 환상이나 두려움의 대상이다. 우리가 막연하나마 중국을 친숙하게 인식하는 것은 지리적인 인접성, 조선조 내내 지속되었던 우호관계와 일제의 압제를 경험하였다는 공동의 기억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위협적 존재로 느껴지는 까닭은 언제나 강대국으로서 아시아에 군림해왔던 오랜 역사적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는 중국에 대한 무지다. 중국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중국을 알아야 하고, 우리와 그들 사이에 축적돼온 역사를 알아야 한다. 연행은 지난 일이고, 거기서 건강한 미래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역사는 이해하는 만큼 쓸 수 있고, 쓸 수 있는 만큼 만들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책을 내며' 중에서


저자소개

저 : 이승수
경기도 광주 사람으로 한양대 국문과에서 수학했다. 문학을 중심으로 역사와 지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옛이야기를 듣고, 이를 세상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일을 한다. 10년쯤 뒤에 재미와 울림이 있는 한국문학사를 짓는 꿈을 종종 꾼다. 최근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거문고 줄 꽂아놓고』 등의 책을 냈으며, 「박문수 전승의 역사적 기반 탐색」, 「불가(佛家) 한시(漢詩)에 내재된 그리움과 번민」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경희대학교 혜정박물관의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한양대에서 강의하고 있다.

저 : 김태준, 이승수, 김일환
세 사람은 길 위에서 만났다. 나이와 고향과 종교와 학교는 모두 다르지만, 역사와 길과 북방의 드센 기운을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뜻이 통한다. 사람이 지나면 길이 나고, 그 길에는 세월과 사연이 쌓이는데, 그 세월을 헤치면서 옛 사연들을 탐색하는 것이 이들의 직업이다. 이 책에서 다룬 연행로는 그 수많은 길 중에서 비교적 큰길에 속한다. 연행로에 대한 후속 보고서를 준비 중이다. 김태준은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정년퇴임하고 남양주 축령산 아래에 한거 중이고, 이승수는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의 연구교수, 김일환은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으로 있다.


목차

책을 내며 : 미래에 이르는 과거, 연행길

연행로의 옛 풍경과 오늘
세계와의 조우를 꿈꾼 조선 지식인
노중 애환
도강, 경계 넘어서기
장성의 축조는 끝나지 않았다 - 호산虎山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전장 - 우모령牛毛嶺
기맥이 상통하는 땅 - 압록강에서 책문까지
버드나무 꺾어 세워도 넘보는 이 없다 - 책문柵門
봉황이 머물다 날아간 곳 - 봉황산
존재의 내력에 대한 통찰과 강역론疆域論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 통원보 구간
청석령 지나거나 초하구 어드메냐
이름은 남았으되 옛 사연은 간 곳 없다 - 석문령 길
새로운 세계의 발견 - 요동벌
천하의 격랑이 일었던 곳 - 요양遼陽
조롱에서 벗어난 새처럼 - 천산
조선과 청의 새로운 관계 - 심양 길
조선인의 애환이 서린 도시 - 심양
기꺼이 그를 위해 채찍을 잡으리 - 청 태종
벌판에서 뜨고 지는 해를 보다
새로운 세계관이 탄생한 곳 - 의무려산
옛 전장을 지나며 - 명.청 교체기의 격전지들
만리장성의 동쪽 끝 - 산해관

연행의 모든 것
참고문헌
찾아보기


출판사 서평

▶ 연행이란?
외교의 일환으로 중국에 건너간 중국 사행을 통칭하는 말이 바로 ‘연행燕行’이다. 연경행燕京行의 줄임말인데, 연경은 원·명·청의 수도였던 북경의 옛 이름이다. 조선 후기 북경을 다녀오는 사절단을 일컬어 ‘연행사’라 했으며 마찬가지로 사절단이 오간 길은 ‘연행로’, 이들이 남긴 기록을 ‘연행록’이라 했다. 압록강을 건너 북경에 이르는 연행길은 1,000년 가깝게 이어온 교역과 문명의 통로였다. 이 연행길은 한해에도 2번 이상, 한번에 대개 5백여 명씩의 조선 사람이 오간 길이다. 이 길을 만든 것은 수백 년을 지속한 한중간의 특수한 외교제도였다. 하지만 연행이란 말은 청나라 성립 이후에 주로 쓰인 것이지 조선 초만 해도 중국 사행은 천자에게 조회하러 간다는 뜻으로 보통 ‘조천朝天’이라 했다. 그런데 청나라가 세워진 후에는 한낱 오랑캐들을 떠받드는 말을 쓰는 것을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고, 그래서 가치판단이 배제된 ‘연행’이란 용어를 쓰게 된 것이다. 그러니 ‘연행’이라는 이름에도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고뇌가 담겨 있는 셈이다.


▷왜 잊힌 옛길을 기억해야 하는가?
역사적으로 한국과 중국은 지리학적 환경에서 비롯된 숙명적 관계였다. 남북의 분단으로 한동안 교류가 막혔지만, 한중 국교가 재개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의 문물이 왕성하게 오가고 있다. 한편에서는 젊은이들 중심의 한류에서 서로의 경계가 무색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의 고구려 역사 논쟁에서는 촌치의 양보도 없는 긴장감이 팽배해 있다. 때문에 이웃나라 중국과 우리와의 역사적 관계를 잘 알아야 그들의 행동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고, 나아가 미래의 관계를 가늠해볼 수 있다.
치욕스러운 사대외교였다는 평가와 현실적인 무역제도였다는 평가가 엇갈리긴 하지만, 이건 가치평가의 문제이고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연행을 했으며 수백 권에 달하는 여행기를 남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자랑스럽다고 마구 과장할 것도 아니고, 부끄럽다고 감출 일은 더더욱 아니다. 중요한 것은 한국과 중국을 잇는 큰길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연행길’이었다는 사실이다. 연행은 조선의 정체성을 구성했던 결정적인 요소였고, 또 우리가 오늘날 조선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핵심적인 키워드가 된다.


▶연행길을 더듬어본 성과
위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김태준, 이승수, 김일환을 비롯한 여러 사학자들이 답사팀을 꾸려 2003년부터 2005년에 걸쳐 몇 차례의 연행로 답사를 다녀왔다. 연행사들이 지나간 길을 직접 밟으면서 보고 느낀 감상과 직접 찍어온 현장 사진들, 역사적 기록을 버무려 완성된 이 책은 조선 시대 연행로의 현장 답사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오랫동안 쓰지 않아 버려져 있던 연행로의 대략을 인문지리학적으로 재구성한 것이 큰 성과이다. 기존의 연행로 답사 보고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두 기행문의 성격이 강해 학술적 뒷받침이 튼실하지 않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들이 옛길을 되짚어간 까닭은 문헌학과 지리학을 조화롭게 통합하여 연행로를 재구성하고 그 역사적 성격과 의의를 밝히기 위해서였다. 이는, 크게는 조선사의 이해, 궁극적으로는 지난 역사를 정확하게 이해함으로써 오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조선 지식인이 연행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
지적 탐구심으로 넘쳤던 선비들은 연행을 견문을 넓히고 세계와 호흡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호기로 여겼다. 특히 박지원?박제가와 같은 북학파 학자들은 여행의 흥미나 이국 풍물에 대한 관심 차원을 떠나, 체험과 견문을 통해 학문적인 가설을 확인하는 한편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전망을 제시하려 노력했다. 또 조선 지식인들은 연행을 통하여 조선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변화하는 세계정세를 파악하려 하였다. 세종은 문물을 정비하고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중국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외교 사행을 강화하였다. 사신의 왕래를 통해 무역이 이루어졌고 많은 서적이 들어왔다. 덕분에 조선의 문화는 급속도로 발달했다. 하지만 이러한 안정된 국제관계의 그늘에는 여러 가지 폐해도 자라고 있었다. 조선은 명나라의 문화를 닮아갈수록 문약해져갔다. 이론과 명분은 승했지만 경제와 안보 등에 있어서는 결정적인 허점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허점들이 결국 임진왜란을 불러왔고, 임진왜란은 조선의 대명 종속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오늘날 우리가 연행을 통해 얻어야 할 것
하나 / 한족 전통의 문명을 이어받은 명은 의심할 바 없는 세계의 중심이고, 이들이 주변의 민족들을 제압하며 그 질서를 지속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사는 가변성을 지니며, 국제질서는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났고, 조선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그러니 어느 한 세력에 자국의 안전을 맡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오늘날 우리 또한 미국의 힘에 의존해 눈치만 보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조선과 청의 관계, 한마디로 요약해 연행은 우리가 통절히 되새겨야 할 교훈을 준다.

둘 / 또 중국 땅에 자리한 우리의 유산들에는 우리의 이름이 지워지고 중국의 소유로 되어 있다. 답사팀이 고구려 성터를 물어보면 한결같은 대답은 “뿌지다오!” 모른다! 였다. 중국이 국가의 정체성을 지키는 최선?최후의 방법은 언제나 자기중심의 역사 서술이었다. 역사 전쟁은 역사를 통해 풀 수밖에 없다라는 게 오늘날 답사팀이 연행로에서 깨달은 진실이다.

셋 / 조선의 지식인들은 청나라를 연행할 때 중국어를 할 줄 몰라 온전히 통역관에게만 의지해야 했다. 아무리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어도 오랑캐 말을 배울 수 없다, 한문이면 만사형통이라는 게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인식이었다. 이는 영어만 잘 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는 현재 우리 사회를 한번 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든다.


▷연행의 이모저모
笑 1/ 구첩口妾
연행사들이 연행 도중 여인을 가까이 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그 결핍감을 수다로 채우며 긴 여행의 무료함을 달래곤 했다. 이를테면 길을 가다가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면 말로만 첩으로 삼았는데, 이를 구첩이라 하였다. 왕명을 받든 사행 중에 저 여인은 내 첩이고 이 여인은 자네 첩이니 하며 실없이 옥신각신하는 연행사들의 모습이 오늘날과 다르지 않아 웃음을 자아낸다.

笑 2/ 니 라이라이!
사신들이 처음으로 민가에서 묵었기 때문에 재미있는 일화도 종종 생겼다. 그 중에서 1712년 김중화라는 사람이 한어를 좀 안다고 주인에게 “니 라이라이!(?來來)”라고 했다가, 아내를 부르는 말인 “나이나이(??)”로 잘못 알아들은 주인에게 봉변을 당하고 이후로는 입을 봉했다고 한다.

笑 3/ 기상새설
박지원은 연행 중에 신민시에 들러 전당포 안을 구경하다가 주련을 부탁하는 주인에게 길에서 보았던 ‘기상새설(欺霜賽雪)’ 넉 자를 크게 써주고 흡족해하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반응과 달리 주인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자, ‘촌놈들이 뭘 알랴’ 투덜거리며 나와버렸다. 대범한 척했지만 박지원은 내내 찜찜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서리를 속이고 눈과 다툴 만큼 희다’는 뜻의 ‘기상새설’은 국수집에나 거는 깃발이었던 것이다.

歎 1/ 숭명배청
대부분의 연행사들은 명나라가 ‘오랑캐’ 청에 의해 허무하게 무너지고 난 후, 곳곳에서 중화사상이 흔들리는 모습에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여기에는 소중화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조선 지식인의 내면이 엿보인다. 청이 모든 국가 건물이나 공문서에 한자와 만어를 병기한 점을 못마땅해 했고, 변발 청인을 보고는 이들의 조상도 원래는 한족일 것이라며 안타까운 심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했다.

歎 2/ 강역의 축소
중국에 가기 위해 반드시 건너야 했던 압록강에서 연행사들은 우리 강역이 줄어듦을 한탄했다. 홍경모는 ‘조선의 옛 강역은 고구려로부터 모두 중국에 넘겨주어, 지금은 북쪽으로 한 줄기 물로 양국의 경계를 삼아 그것만을 의지하고 있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탄식했다.

快/ 장쾌한 명승지를 만나다
평생 산속에서만 살았던 대부분의 연행사들에게 일망무제한 요동벌은 그 자체로 경이요 충격이었다. 일점 언덕 없이 끝없이 펼쳐져 하늘과 맞닿은 벌판은 안목을 새롭게 했다. 연행사들은 그 크기에 압도당하고 세계관, 나아가 우주관의 변화를 경험하였다. 김창업, 이정구 같은 이들은 정해진 연행 노정에서 벗어나 나 홀로 유람을 즐기기 위해 중국의 4대 명산인 의무려산, 천산, 봉황산 등에 올라 절경을 맘껏 즐겼다.

苦/ 세 가지 괴로움
새벽에는 안개, 낮에는 먼지, 저녁에는 바람이 무차별 엄습하여 연행 내내 연행사들을 괴롭혔다. 나라를 대표하는 입장으로 가는 막중한 책임감도 정신적으로 피로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열악한 자연 환경 속에서 두 달 가까이 여행을 하면서 쌓이는 육체적인 피로감도 연행사들로 하여금 하루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본문 내용

세계와의 조우를 꿈꾼 조선 지식인
연행은 막중한 임무를 지고 가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부담이 크고, 또 낯선 환경에서 신체적으로도 피곤한 일이라 보통은 내켜하지 않았지만, 연행을 누구보다 기대한 이들이 있었다. 박제가, 임창협, 박지원, 김창업과 같은 실학자들이 그들이다. 당시 연행은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 지식인들은 연행을 통해 자신들의 견문과 안목을 넓히는 계기로 삼았다.

노중 애환
연행사들이 중국 대륙을 지날 때 반드시 겪는 세 가지 괴로움이 있었으니, 바로 새벽에는 안개, 낮에는 먼지, 저녁에는 바람이었다. 이만수가 특히 연행 사신들의 애환과 연행 풍정을 풍부하면서도 간명하게 잘 그려냈다. 그 첫째는 ‘한가로움’이고 둘째는 ‘바쁨’, 셋째는 낯선 풍습과 접해서 생기는 ‘우스운 일’, 넷째는 중화사상이 흔들리는 모습에 대한 ‘탄식’, 다섯째는 풍광의 장대함에서 느끼는 ‘통쾌함’, 여섯째는 재물을 밝히는 청나라에 대한 ‘부끄러움’, 일곱째는 선진문물에 대한 ‘부러움’, 여덟째는 ‘괴로움’, 마지막 아홉째는 ‘기쁨’이다.

도강, 경계 넘어서기
연행사들이 중국에 가기 위해 필히 건너야 했던 압록강은 그때의 조선인들에게나 오늘날 우리에게나 의미심장한 표상을 지닌다. 박지원은 고대의 강역은 지금의 압록강 북쪽에서 찾아야 한다며, 강역의 줄어듦을 탄식했다. 답사팀도 오늘날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는데도 구체적인 대응책 없는 우리의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연행사들은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의주에 머무르면서 떠날 채비를 하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도강의 심사는 다양했는데, 어떤 이는 미래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있었고, 박지원은 명에서 청으로 정권이 교체된 상황에서 조선인으로서 어떤 경계에 서야 할지를 고민했다.
장성의 축조는 끝나지 않았다_호산
만리장성의 동쪽은 산해관에서 끝남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현재 호산장성을 만리장성의 끝이라 우기고 있다. 호산장성은 한국(조선)에 대한 배타적 금 긋기의 표징이다. 답사팀은 호산에 올라 압록강을 굽어보고, 강 건너 자리한 조선 제일의 누정, 통군정을 바라보며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중요성을 설파한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전장_우모령
명?청 교체의 분수령은 사르후 전투이다. 이 전투로 인해 연행의 성격이 바뀌기도 했다. 이 전투가 심하 전역에서 벌어졌고, 그 이후에도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수많은 조선의 장졸들이 이 땅에 피를 쏟았는데, 우리 역사에서 잊히고 있다. 저자는 일부러 연행로에서 한참 벗어난 이곳을 찾아, 밝고 아름다운 면만을 기억하고 내세우려는 우리의 얄팍한 관성을 꼬집는다.

기맥이 상통하는 땅_압록강에서 책문까지
구련성은 연행사들이 이국의 첫 밤을 보낸 곳이다. 때문에 기대와 흥분으로 잠 못 드는 심정을 그린 시가 많다. 연행단은 온천이 솟는 금석산과 오룡배, 그리고 정몽주도 묵었던 탕산성을 지나 총수산을 차례로 지난다. 연행사들은 중국 산천의 기맥이 조선과 통한다고 평했다.

버드나무 꺾어 세워도 넘보는 이 없다_책문
책문은 공식적인 국경이었는데, 버드나무 가지로 이은 울타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청의 전성기에는 아무도 넘보는 외적이 없었다. 여기에서 하늘에 닿을 듯 높고 튼튼한 장성을 쌓아도 정치가 혼란하면 안에서 썩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정치가 건실하면 나무를 세워 사립문 같은 국경을 만들어도 아무도 엿보지 못한다는 교훈을 준다. 연행사들은 이 책문을 통과하면서 본격적인 중국 문화 체험을 하고, 문화 쇼크(Culture Shock)를 받는다.

봉황이 머물다 날아간 곳_봉황산
많은 조선 사신들이 봉황산을 지나며 이곳이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울 때 도읍했던 곳이라고 추억하였다. 18세기 후반 조선 유자들은, 안시성 전투가 벌어졌던 이 봉황산에서 자연스레 고구려의 후예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민족적 소속을 상기했다.

존재의 내력에 대한 통찰과 강역론
청조의 성립 이후 연행에 나선 조선 지식인들은 현실과 당위 사이의 괴리, 피아간의 차이에서 출발했다. 괴리와 차이에 대한 인식은 반성과 통찰을 낳았다. 이 과정에서 명분론자들은 화이론적 세계관을 고수하였고, 현실론자들은 상대적 세계관을 내세워 청조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조선 역사의 고유성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였다.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_통원보 구간
통원보는 연행사들이 네 번째로 묵던 곳이다. 역사상 이곳에서 가장 오래 머문 박지원은 이곳에서 중국의 난방문화인 ‘캉’, 벽돌 사용의 편리함을 주장하였다.

청석령 지나거다 초하구 어드메냐
1637년 조선이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은 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국에 볼모로 가게 되었다. 이때 두 왕자가 유독 진탕길인 초하구를 지나면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이 뒤로 청석령 초하구는 병자호란에서 패전을 상징하는 문화적 관용어가 되었다.

이름은 남았으되 옛 사연은 간곳없다_석문령 길
낭자산에는 당 태종이 패주할 때 닭 울음소리 때문에 목숨을 구했다는 계명사가 있다. 이곳을 지나면 요동 벌판에 이르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석문령이 나온다.

새로운 세계의 발견_요동벌
연행사들은 요동벌의 어마어마한 광활함에 압도당했다. 요동벌은 또 지구설이라는 새로운 천체관을 육안으로 확인해주는 공간이기도 했다. 박지원은 요동벌을 처음 대면한 순간, ‘요동벌은 천하의 호곡장好哭場’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천하의 격랑이 일었던 곳_요양
사방이 탁 트인 벌판에 자리한 요양은 지리적 요건 때문에 천고의 전쟁터였다. 금?원?청은 차례로 이 요양을 차지하여 중원의 주인이 되었다. 명대에 연행사들은 요양성 밖에 있는 조선관에 묵었다. 특히 백탑은 요양 관람의 백미였다.

조롱에서 벗어난 새처럼_천산
대부분의 연행사는 정해진 길로 다녔지만, 무리에서 일탈해 중국 문화를 만끽한 이들이 있었다. 특히 이정구, 김창업은 일행과 떨어져 산세가 수려하기로 유명한 천산을 찾아 현지인들과 언어와 국적을 초월한 우정을 나누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자만이 그러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음을 가르쳐준다.

조선과 청의 새로운 관계_심양 길
청조가 중원을 차지하고 조청 간 새로운 외교관계가 성립되면서 심양은 공식적인 연행 노정이 되었다. 수많은 포로와 볼모, 그리고 삼학사들이 이 길을 지나 끌려갔으므로, 이곳을 밟은 연행사들은 공통적으로 비분을 느끼는 한편 온갖 공물을 싣고 청국에 상납하러 가는 자신의 처지에서 비롯된 자기모순에 시달리기도 했다.

조선인의 애환이 서린 도시_심양
심양은 조선인의 애환이 서린 도시라 할 수 있다.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심양에서 9년간 세자관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김상헌과 최명길 같은 척화파 인사들, 그리고 수많은 포로들이 심양에서 포로생활을 하였다. 지금도 심양의 서탑가에는 조선족 거리가 남아 있다.

기꺼이 그를 위해 채찍을 잡으리_청 태종
당시 대다수 조선 지식인들은 청에 대한 반감으로 그들을 되놈이라 비하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청조에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 모순에 시달렸다. 그러나 실제로 ‘오랑캐’ 청 태종은 이민족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폈고, 중국에 문화적?물질적으로 큰 번성을 가져온 지도자였다.

벌판에서 뜨고 지는 해를 보다
심양을 떠난 연행사들은 북경으로 가기 위해서 영안교를 건너야 했는데, 중국의 전통 교량 중에서도 손꼽히는 영안교의 아름다움과 튼튼함을 보고 나무로 만든 조선의 다리와 비교하며 감탄하였다.

새로운 세계관이 탄생한 곳_의무려산
중국 동북의 진산인 의무려산도 조선 지식인들의 동경하던 명승지다. 홍대용은 이 의무려산을 기존의 어떤 질서의 지배를 받지 않으면서 새로운 질서를 잉태하는 곳으로 보았다. 그러면서 전통적인 화이론을 해체해 조선이 우주의 중심이어야 함을 설파했다.

옛 전장을 지나며_명?청 교체기의 격전지들
십삼산에서 산해관에 이르는 노정은 모두 명?청 교체기의 격전지들이다. 대릉하를 지나면 금주가 나오는데, 이곳은 1641년에서 1643년 사이 조선 군대가 참전했던 곳이기도 하다.

만리장성의 동쪽 끝_산해관
산해관은 명대 제일의 관문답게 그 규모가 웅장하면서도 고도의 방어 기능을 갖춘 것으로 유명해 ‘천하제일관’이라 일컬어졌다. 또 명나라가 대청 항전의 최후 저지선으로 삼은 곳도, 청이 중원 정복을 위한 마무리 돌파선으로 여긴 곳도 산해관이었기 때문에, 산해관은 명과 청의 공간적 경계인 동시에 역사적 교체의 현장이었다. 그러므로 조선 연행사들에게 이 산해관은 중국의 규모와 제도를 표상하는 건축물이자, 아직도 명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비분을 자아내게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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