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판의 머리말에서 베르크손이 “이 책은 정신의 실재성(realite)과 물질의 실재성을 인정하며, 기억(memoire)이라는 한 명확한 예를 통하여 그 둘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이 책은 분명히 이원론적이다.” 라고 말한 것처럼, 이 책의 핵심 주제는 심신관계의 문제이다. 즉 마음과 몸, 영혼과 신체가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그래서 부제가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 관한 시론’이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떻게 만나는가? 책 제목 그대로, 물질과 기억으로 만난다. 그렇다면 다시, 물질은 무엇이고 기억은 무엇이며, 이 둘은 어떻게 서로 만나는가?
보통의 상식으로 볼 때, 물질은 우선 물체이다. 물체는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만지거나 볼 수 있고, 고정적이어서 일정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물질의 진정한 모습일까? 우리가 물질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실용적 필요에 의해 재단해 놓은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실재 물질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세상은 모두 이어져 있다. 실재하는 것은 움직이는 연속성이다. 연속적 운동이다. 운동과 구별되는 운동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모두 운동이다. 플럭스이다. 즉 물질은 플럭스이다. 이것이 베르크손이 생각하는 물질의 실상이다.
그리고 베르크손은 자기 동일성을 가진 생명의 운동과 자기 동일성을 가지지 못한 물질의 운동으로 구별한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떻게 다른가?
물질은 현재를 반복할 뿐이다. 그것에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는, 쉽게 말하여 그냥 부르르 떨고 있는 진동이 있을 뿐이다.
반면 생명은 진동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응축한다. 응축한다는 것은 지속의 어느 부분 동안의 일을 단번에 뭉친다는 것이다. 즉 물질처럼 현재의 반복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뭉치고 이어져서 서로 속으로 밀고 들어간다. 과거가 현재로 이어지고 현재가 미래로 이어진다. 그것이 바로 지속이다. 지속하는 것은 기억이 있다. 기억이 있다는 것은 과거가 현재, 미래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기억이 있는 것은 과거를 단지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응축한다.
그리고 진동을 응축한다는 것은 물질의 필연에 따라가지 않는다는 것, 즉 자유의 표현이다. 응축하는 것은 기억이 있으며, 기억이 있는 것은 자유롭다. 생명이 파악하는 질은 물질의 진동을 응축한 것이며, 그 응축을 점점 풀면 질이 점점 희미해지고 종국에 가서는 물질처럼 동질적인 진동으로 해체될 것이다. 생명은 그러므로 긴장이다. 생명의 긴장과 물질의 이완이 서로 만난다. 어디서 만나는가? 물질이 항상 있는 현재에서 만난다. 생명은 과거를 현재에도 보존하는 기억이며, 그 기억이 현재만을 반복하는 물질과 현재에서 만난다.
그리고 현재가 드러나는 곳을 총칭하여 우리는 지각이라고 부른다. 즉 물질과 정신이 만나는 곳은 우선 지각에서이다. 이것은 곧 지각이 이루어지는 현재라는 시간에서 만난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베르크손이 누누이 강조한 바와 같이, 심신관계는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이해되어야 한다고 한 말의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