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묘법연화경 보문품妙法蓮華經 普門品』이란 괴로움의 핍박을 벗어나는 진실한 이치를 갖춘 말(眞詮)이다. 사람들이 능히 항상 이 경으로써 관觀을 지어서 일념一念이 막 싹트면 곧 대비하신 수승한 상호를 뵙고, 일체 온갖 괴로움이 사라지니, 그 공덕이 불가사의하다.
오직 복은 선행에 있고 화는 방종에 있는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과보를 보이시어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감히 악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셨다. 대개 천당과 지옥은 모두 사람이 행한 바에 말미암고, 사방 한 치의 마음에 어긋나지 않는 까닭에 선한 자는 천당에 오르게 되고, 악한 자는 지옥에 떨어지게 된다.(명나라 영락대제 서문) (7p)
▶ 방편을 설명하기 위해 먼저 「법法」이란 글자를 해석하고 난 후에 다시 이 법이 어떻게 미묘한가를 말하겠습니다. 먼저 중생법을 말하면 『법화경 대성』에서는 「중생법이란 미혹이 있는 까닭이다(衆生法者 因迷有故)」라고 주해합니다. 중생법은 어디에서 옵니까? 심법을 미혹하여 오는 어떤 것입니다. 「진여법이 하나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以不了眞如法一)」 우리가 진여법이 하나임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명료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화엄경華嚴經』에서 법계는 하나이고 둘이 아니며, 오직 하나가 있어야 진眞이 되고 일진법계一眞法界이다는 문구를 알고 있습니다. 둘은 허망한 것으로 진실하지 않습니다. 법계는 있는 그대로 일진一眞입니다. 어떻게 해야 진여법이 하나임을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는 심지心地로부터 공부해야 합니다. 바로 『아미타경』에서 제창하고 있는 일심불란一心不亂입니다. 일심이 진심眞心이고, 일심이 나타난 법계를 일진법계라 합니다. 그래서 만약 일심법계를 증득하고 싶다면 말하자면, 화엄의 무애無? 경계에 들어가고 싶다면 반드시 일심이어야 합니다. 이로써 수행의 중점은 「일심불란」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범부의 미혹은 바로 미혹하여 일심을 잃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일법계 안에 있을 때 비로소 무량한 법계를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28p)
▶ 보리심은 『무량수경』에 있습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첫째는 직심直心, 둘째는 심심深心, 셋째는 대비심大悲心입니다. 실제로 이 세 가지 마음은 일심으로 직심을 본체로 삼습니다. 심심深心은 자수용自受用으로 바로 자신이 받아서 쓰는 것입니다. 대비심은 다른 사람이 받아서 쓰는 타수용他受用으로 바로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나, 일을 대할 때나, 사물을 대할 때나 대비심을 써야 합니다. 자기를 대할 때는 심심을 써야 합니다. 직심은 평등심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 평등심이 있습니까? 일체 경계에 언제 평등하였습니까? 모두 평등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나는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 더 강하고, 언제나 그 사람들은 모두 나만 못하다. 이것이 범부심입니다. 분별ㆍ집착ㆍ망상이면 미혹하고,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깨달으면 만법이 평등합니다. (67p)
▶ 만약 중생을 두루 제도한다고 말하려면 그가 증득한 위차가 반드시 매우 깊어야 합니다. 그래서 『비화경』ㆍ『능엄경』ㆍ『법화경』 이 세 가지 경을 합쳐서 보아야 비로소 관세음보살에 대해 진정한 요해와 상당한 인식이 생기며, 비로소 우리 자신의 신심을 건립하고 관세음보살과 감응도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리에 대해 절대로 소홀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진지하게 연구해야 합니다. 이미 문혜를 말씀드렸습니다. 문聞이란 무엇입니까? 이근耳根 가운데 듣는 성품(聞性)을 말하는 것입니다. 듣는 성품으로 여여한 이치를 들으면 강설한 것은 진리입니다. (71p)
▶ 범부의 마음을 쓰는 것은 바로 심의식을 쓰는 것입니다. 단지 여전히 구제할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염불법문으로 「업을 짊어진 채 왕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법문을 믿기 어려운 법(難信之法)이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대소승 경론에서는 이런 설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업을 짊어진 채 왕생할 수 있다는 설법이 있습니까? 단지 이 법문만이 있을 뿐입니다. (72p)
▶ 우리는 일생동안 복을 닦아서(修福) 언제 누립니까? 임종시 마음이 전도되지 않길 희망합니다. 그러면 결정코 왕생합니다. 닦은 복은 평상시 다 누리고, 임종시에 전도되어 어수선해진다면 이번 일생도 또 놓쳐버린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닦은 복보는 다른 사람이 누리게 하고, 우리의 복보는 여기에 보존합니다. 단지 보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늘려나갑니다. 우리의 복보에 이자를 놓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과 같습니다. 장차 얻게 되는 것은 우리가 보시하는 것에 비해 클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는 알기 어렵습니다. 이 이치를 명백히 이해하고 복을 짓되, 복을 누리지 마십시오. 제불보살님과 고래의 여러 조사ㆍ대덕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