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나’를 이기고, 한얼님과 통하다
- 다석 사상에서 찾은 깨달음의 길
류영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본디부터 여기 있었던 게 아니고 어디서 떨어져 나왔다는 느낌이 이 마음속에 있다. 이렇게 타락된 느낌이 있으니 본디의 온전한 모습으로 오르려고 한다.” 이처럼 낱동으로 떨어진 ‘나’는 온전하고 거룩한 우주의 임자이자 절대의 존재, 즉 ‘한얼님’과 만나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한얼님이 주신 ‘참된 나’를 만날 수 있다. 류영모는 이를 ‘한얼 사상’이라 불렀다. 류영모에 따르면, 사람이 할 일은 한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이 삶의 목적이자 보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정신 세계에서 한얼님과 연락이 끊어진 지 오래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배운 이나 못 배운 이나 이승의 짐승이 되었다. 우리들이 산다고 하는 몸뚱이는 피와 살의 짐승이다. 질척질척 지저분하게 먹고 싸기만 하는 짐승이다. 한얼님으로부터 한얼님의 생명인 얼을 받아 몸나(제나)에서 얼나로 솟날 때 비로소 한얼님의 뜻을 좇는 한얼님의 아들이 된다. …… 한얼님을 찾아야 한다. 한얼님을 알자면 한얼님과 얼로 교통이 되어서 아는 것이다. 한얼님의 얼과 통하는 것이 있어야 정신이 옳게 발달이 되고 성장이 된다.”(류영모) ―1부 한얼님께 가는 길·22, 23쪽
류영모에 따르면, 한얼님께 나아가는 것은 한얼님의 뜻을 좇아 생각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수성(獸性)이 깃든 몸나(제나)로부터 비롯되는 괴로움을 끊어내야 비로소 한얼님과 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박영호는 마음의 기량(器量)이 큰 사람만이 영원 절대의 한얼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얼님께 이르는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가리키는가? 저자는 예수·석가·톨스토이·간디·노자, 그리고 류영모가 그러한 삶을 살다간 이들이라고 말한다.
예수와 석가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고 갔다. 톨스토이와 간디도 그것을 보여주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들은 환락의 도시를 떠나 시골에 가서 농사짓고 사는 것을 으뜸으로 쳤다. 그리고 결혼을 하지 말 것이며 이미 하였다면 성생활은 끊어야 한다고 했다. 착하게 살되 이웃을 도우라고 하였다. 항상 죽음을 생각하여 근사지심(近死之心)으로 겸손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술, 담배, 도박, 오락 등 건전하지 않는 생활 습관은 과수에 도장지를 자르듯 끊어버려야 한다. 류영모는 신사복을 입은 적이 없었다. 톨스토이는 젊을 때는 하루에 12번씩이나 와이셔츠를 갈아입는 멋을 부렸으나 오십 세에 《참회록》을 쓴 다음으로는 러시아 농부들이 입는 루바사카를 입고 농부들과 더불어 농사하기를 즐겼다. 이것이 한얼님께로 나아가는 길이다. 노자(老子)도 사람 다스리고 한얼님 섬김에는 아낌(농사) 같은 게 없다고 말하였다. ―1부 한얼님께 가는 길·62쪽
예수와 석가와 공자의 정신은 ‘하나’다
- 기독교 밖의 진정한 기독교인
류영모는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배웠다. 15살에 세례를 받고 기독교를 받아들였으며, 1910년 20살 때 남강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의 교사로 재직했다. 이때 기독교를 전파하여 일제 강점기에 오산학교가 기독교 운동의 중요한 인물들을 길러내는 계기를 이루었으나 정작 류영모는 이 무렵에 톨스토이를 읽으며 정통 기독교 신앙에 의심을 품었다.
류영모는 성경 자체를 진리로 떠받들며 예수를 절대시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예수를 바로 알기 위해 석가와 노자의 사상을 공부한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불교·유교·노장 사상 등 동서양 모든 종교와 철학에서 하나의 진리를 본 것이다. 바로 예수·석가·노자·공자·맹자 등 성자들의 정신은 멸망의 생명인 ‘몸나’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인 ‘얼나’에 있다는 것이었다.
예수의 한얼 나라와 석가의 니르바나 나라는 말은 다르지만 실체는 하나이다. 그런데 그 뜻이 잘못 이해되고 있다. 예수의 한얼 나라를 천당으로 아는가 하면 석가의 니르바나는 사람이 죽는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예수의 한얼 나라는 이른바 천당이 아닌 얼의 나라이다. 석가의 니르바나는 죽음이 아니고 얼의 나라이다. 사람의 생각 속에 얼을 보내주는 얼의 나라이다. 얼의 나라나 한얼님이나 같은 뜻이다. 지금의 기독교, 불교를 바로 세우고자 한다면 예수의 한얼 나라, 석가의 니르바나 나라의 뜻부터 바로 찾아야 한다. 예수와 석가가 깨달은 얼나는 한 생명이다. 예수와 석가는 얼나로는 하나이다. ―3부 생명 혁명의 세 단계·311, 312쪽
류영모는 22살에 교회 나가기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교회를 나가지 않았을 뿐이지 예수를 버린 것도, 멀리한 것도 아니었다. 류영모는 예수와 더 가까워지고자 성경을 더 자주 정독했으며 마침내 자신만의 독특한 예수관을 세웠다.
류영모에 따르면, ‘얼나’를 깨달으면 예수처럼 십자가의 죽음을 맞고서도 정신이 죽지 않는다. 예수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김”(요한 5:24)이라고 말하였다. 다시 말해, 땅의 어버이가 낳으신 죽음의 생명인 제나(몸나)에서 한얼님이 낳으신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옮겨 생명 바꿈을 한 것이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가르치고 깨우쳤다. 이처럼 한얼님이 보내주신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달으면 우리도 예수, 석가와 같은 한얼님 아들이 될 수 있다.
예수는 한얼님께 올리는 예배는 무슨 제물을 제단 위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얼나를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절대유일(絶對唯一)이신 얼의 한얼님이 참나임을 깨달아 알고, 한얼님의 생명인 얼을 받아 얼로 솟나 얼로 한얼님과 이어져 한얼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영원한 생명인 얼나이다. 이에 참삶의 기쁨이 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를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보혈이 이 몸이 지은 죄를 사하는지는 모르겠다. 예수가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린 것이라 믿으면 영생한다는 것은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류영모) ―1부 한얼님께 가는 길·119쪽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이기자는 것이 종교다.”
- 삶과 죽음 너머를 이야기하다
류영모는 평생 동안 삶과 죽음이라는 근원적 물음에 답을 찾고자 하였다. 왜 우리는 결국 죽음에 이르는 몸을 지닌 채 태어났을까? 죽음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죽음의 공포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류영모는 종교의 핵심이 ‘죽음’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데 있다고 보았다. “죽는 연습이 철학이요, 죽음을 이기자는 것이 종교”라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맞고서도 ‘내가 세상을 이겼다.’고 말하였다. 류영모에 따르면, 예수처럼 생사(生死)를 초월하여 제 몸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는 사람만이 한얼님이 주신 온전한 진리 정신에 다다를 수 있다.
“이 몸나는 참나가 아니다. 참나인 얼나를 실은 수레라고나 할까. 참나인 얼나는 보이지 않지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얼님도 보이지 않지만 한얼님은 있다. 예수는 간단하게 말씀하였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는 죽음이 없다. 이 껍데기 몸나가 죽는 거지 얼나가 죽는 게 아니다. 죽음을 무서워하고 싫어할 까닭이 없다. 죽는다는 것은 이 몸이 퍽 쓰러져서 못 일어나는 것이다. 진리의 생명인 얼나는 영원하다. 이 몸이 훌렁 벗어지는 게 무슨 문제인가? 몸이야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거짓나일 뿐이다. 한얼님의 아들이란 몸의 죽음을 넘어선 얼나다. 몸은 죽지만 얼은 살아 빛난다.”(류영모) ―1부 한얼님께 가는 길·65쪽
류영모는 세상에 나서 죽고 마는 몸나는 거짓 생명이며,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보았다. 더불어, 인생의 뜻을 알았으면 아무 때 죽어도 좋다고 말하였다. 류영모에게 인생의 의미란 한얼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 있었다. “‘참나’가 한얼님의 아들임을 깨달으면 아무 때 죽어도 좋다. 내 맘속에는 벌써 영원한 생명(얼나)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얼님이 주시는 얼을 깨닫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이 세상에 살다간 이들이 여럿 있었다. 바로 예수·석가·톨스토이·간디, 그리고 류영모였다.
짐승이요 멸망의 생명인 제나(몸나)로 사는 이와 한얼님 아들이요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사는 이는 그 가치관이 그야말로 하늘과 땅만큼 다른 것이다. …… (이것은) 예수, 석가, 톨스토이 마하트마 간디에서 뚜렷이 드러나 보인다. 예수는 사형 죄수가 되기를 거리끼지 않았고, 석가는 크샤트리아 계급의 태자가 빌어먹는 탁발승이 되기를 거리끼지 않았다. 러시아의 귀족 톨스토이는 루바시카 농민복 입기를 거리끼지 않고, 바이샤 계급의 간디는 수드라 차림의 옷 입기를 거리끼지 않았다. 류영모는 서울 종로에 살다가 비봉 산록으로 옮겨서 농사를 지었으며 양복 입기를 거절하고 사진 찍기를 사양하였다. …… 이렇게 멸망의 생명에서 영생의 생명으로 솟나는 변화 없이 한얼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부 예수의 한얼 나라·246, 247쪽
홀로 고요히 기도하라
- 기복 신앙과 자각(自覺) 신앙에 관하여
류영모에게 예수와 석가는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먼저 깨달은 스승이었다. 그런데 현실의 기독교와 불교는 예수와 석가의 본래 가르침을 잊고 예수와 석가를 우상으로 섬기며 복을 달라고 비는 기복 신앙으로 변질되었다.
기독교 신도들은 하나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말한다. 불교신자들은 부처를 믿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믿는다는 말을 생각해보면 믿는 내용을 알 수 없다. 예수 믿는다는 말은 일요일에 교회에 나간다는 말인 것 같고 부처를 믿는다는 말은 이따금 절에 다닌다는 말인 것 같다. 좀 더 밝히면 살아서 복 받고 죽어서 천당 가려고 교회에 가거나 절에 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기복 신자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3부 생명 혁명의 세 단계·263쪽
류영모는 신앙 공부란 한얼님이 주신 얼나를 스스로 깨닫는 자각(自覺)에서 비롯된다고 말하였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하며 빔(허공)과 얼(성령)로 없이 계시는 한얼님 아버지만이 우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류영모에게 예수는 얼나의 깨달음을 깨우쳐주는 둘 없는 스승이었다.
류영모는 바울의 원죄 대속 신앙을 떠나 예수의 얼나 자각(自覺) 신앙을 갖게 되었다. 이는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석가와 노자를 읽고서 예수의 영성 신앙을 알아낸 것이다. 다음 말은 류영모 70살 때의 말이다.
“한얼님 아버지 모신 아들인 얼나를 참나로 보는 이것이 예수가 인생을 보는 눈이다. 절대의 아버지가 계셔 그의 아들 노릇하는 것이 참나인 얼나라는 거다. 예수는 말하기를 ‘내 나라는 이 세상엔 없다.’라고 했다. 나도 예수와 같은 이러한 인생관을 가지고 싶다. 이런 점에서 예수가 나와 관계가 있는 것이지 이밖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걸 신앙이라 할지 예수를 믿는다고 할지 나는 모른다. ―3부 생명 혁명의 세 단계·3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