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서암스님은 평생을 ‘자유’를 갈망했고 ‘자유’ 안에서 살았다.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아무런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며, 주어진 곳에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되면 또 떠났다. 자신의 손에 있던 것들을 훌훌 털고 산속으로 돌아가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일이 있으면 몸을 아끼지 않고 맡아서 했으되, 일에 따른 감투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 책은 '자유인'의 삶을 살았던 서암스님의 생애을 조명한 것으로, 전작에서 불교의 정신세계를 천착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도 생전 스님과의 대화록으로 재생시킨 서암불교(西庵佛敎)의 진면목을 담아낸다.
저자소개
이청
이청은 1945년 울산의 바닷가 마음에서 태어나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 출가와 환속을 거듭하고 여러 학교를 전전하는 등 방황하다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을 계기로 문학인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교사, 기자, 르뽀작가, 사사 편찬 등 여러 집업을 전전하고 2002년 이후로 비로소 늦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의욕을 불태우며 창작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저서로는 『사바행』 『회색의 봄』 『우리들의 초상』 『무덤 속의 축제』 『부처님 동네』 『우리 옆에 왔던 부처』 『사리』 『바람처럼 흐르는 구름처럼』 『13월의 사랑』 『신의 여자』 『대한국인 안중근』 등 소설과 『화두의 향기』 『이 뭣고』 『제3공화국 경제비화』 등 소설 아닌 책들이 있다. 사는 곳은 용인시 수지의 광교산 자락이다. 글에 밝혀 놓은 바와 같이 서암 큰스님과는 오랜 인연이 있어 큰스님 열반 이후 서암불교를 제자리에 세워놓겠다는 열정을 가지고 취재를 계속해오고 있다.
목차
책머리에
1. 몇 장의 삽화-절이 있는 풍경
배고픈 부처님
문학
법난(法難)
말장난
국수
서울
대각사
오두막
2. 밥 짓는 이야기
첫째 날
사람 냄새 / 대착학원 / 열다섯 절집 머슴살이 / 일제(日帝)의 개꿈
둘째 날-유학
배울 수만 있다면 지옥인들 / 골병 / 떠돌이 치과의사의 조수 / 수드라에게도 영혼이 있을까 / 고물장수에서 건설 현장 노가다로 / 두 번째 사신(死神)의 방문 / 자유
셋째 날 - 중도파
무심 / 금강산 / 이판과 사판 / 계룡산 / 도인(道人)과 거지 / 칠불암(七佛庵)의 사생결단(死生決斷) / 유시(諭示)
넷째 날 - 닭 벼슬
경상북도 종무원장 감투 / 꿀단지 / 먹이 싸움
다섯째 날- 양산박
구산선문(九山禪門) 희양산 / 조실(祖室)과 문지기
여섯째 날-宗正
아름다운 회향(回向) / 성철 종정 재추대 / 개혁 - 부처님 법대로 / 종정에서 자유인으로 / 사자산의 구렁이
일곱째 날 - 태어나기 전의 나는 무엇이었나?
내가 없는데(無我), 내 마음은 어디 있는가 / 참선(參禪) - 쉬는 것 / 화두(話頭) / ‘바라는 것’과 ‘실재하는 것’ / 나는 깨친 것 없다
3. 웃음
감성(感性)과 불성(佛性)
보살행(菩薩行)
무위정사(無爲精舍)
보살님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
西庵 큰스님 行狀
출판사 리뷰
생전 스님과의 대화록으로 재생시킨 서암불교(西庵佛敎)의 진면목
작가 이청(李淸)이 저술한 책은 대부분 불교의 정신세계를 천착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작가가 문학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가 지닌 궁극적 가능성을 끝없이 모색해온 과정의 산물이다. 이 평전(評傳)은 서암 스님과의 남다른 인연을 작가가 정리한 것이다. ‘한국 불교의 발전’과 서암불교에 목마른 독자를 위해 꼭 출간되어야 할 책이라는 주위의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서암(西庵) 스님과 봉암사(鳳巖寺)
문경(聞慶)의 희양산(曦陽山) 봉암사는 조계종의 2,500여 사찰 중 유일하게 산문(山門)을 닫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는 특별 수도원으로 동방 제일의 수행도량이다. 봉암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선종의 가풍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곳으로, 한국 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유명하다.
1947년 성철 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 스님이 황폐해진 한국 불교를 바로잡겠다는 원을 세우고 결사 도량을 찾은 곳이 바로 봉암사였다. 이후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 도우 등이 이 결사에 참여하여 공주 규약을 제정하고 추상 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다. 이를 ‘봉암사 결사’라고 한다. 이 결사 정진이 6?25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가 70년대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었다. 향곡, 서옹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납자를 제접했다.
1980년부터 서암 스님이 정식으로 태고선원 조실로 모셔지며 봉암사는 웅비한다. 조계종은 선풍 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한다. 봉암사는 한국 불교의 성지이다. 한국 불교는 달마조사의 선맥을 이어왔는데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구산선문이 근간이 된다. 그 구산선문 중 하나가 희양산문의 종찰인 봉암사이다.
서암 스님은 탈종(脫宗) 후 2001년 하안거 결제에 다시 조실로 추대되어 대중 스님들을 지도하시다 2003년 3월 29일 열반하실 때까지 봉암사와는 말 그대로 하나였다.
타고난 자유인
서암은 평생을 ‘자유’를 갈망했고 ‘자유’ 안에서 살았다.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아무런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며, 주어진 곳에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되면 또 떠났다. 자신의 손에 있던 것들을 훌훌 털고 산속으로 돌아가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일이 있으면 몸을 아끼지...생전 스님과의 대화록으로 재생시킨 서암불교(西庵佛敎)의 진면목
작가 이청(李淸)이 저술한 책은 대부분 불교의 정신세계를 천착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작가가 문학을 통하여 인간의 존재가 지닌 궁극적 가능성을 끝없이 모색해온 과정의 산물이다. 이 평전(評傳)은 서암 스님과의 남다른 인연을 작가가 정리한 것이다. ‘한국 불교의 발전’과 서암불교에 목마른 독자를 위해 꼭 출간되어야 할 책이라는 주위의 간절한 바람이 있었다.
서암(西庵) 스님과 봉암사(鳳巖寺)
문경(聞慶)의 희양산(曦陽山) 봉암사는 조계종의 2,500여 사찰 중 유일하게 산문(山門)을 닫고 일반인의 출입을 막고 있는 특별 수도원으로 동방 제일의 수행도량이다. 봉암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선종의 가풍이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곳으로, 한국 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유명하다.
1947년 성철 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 스님이 황폐해진 한국 불교를 바로잡겠다는 원을 세우고 결사 도량을 찾은 곳이 바로 봉암사였다. 이후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 도우 등이 이 결사에 참여하여 공주 규약을 제정하고 추상 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다. 이를 ‘봉암사 결사’라고 한다. 이 결사 정진이 6?25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가 70년대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었다. 향곡, 서옹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납자를 제접했다.
1980년부터 서암 스님이 정식으로 태고선원 조실로 모셔지며 봉암사는 웅비한다. 조계종은 선풍 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한다. 봉암사는 한국 불교의 성지이다. 한국 불교는 달마조사의 선맥을 이어왔는데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구산선문이 근간이 된다. 그 구산선문 중 하나가 희양산문의 종찰인 봉암사이다.
서암 스님은 탈종(脫宗) 후 2001년 하안거 결제에 다시 조실로 추대되어 대중 스님들을 지도하시다 2003년 3월 29일 열반하실 때까지 봉암사와는 말 그대로 하나였다.
타고난 자유인
서암은 평생을 ‘자유’를 갈망했고 ‘자유’ 안에서 살았다.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되면 아무런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며, 주어진 곳에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되면 또 떠났다. 자신의 손에 있던 것들을 훌훌 털고 산속으로 돌아가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일이 있으면 몸을 아끼지 않고 맡아서 했으되, 일에 따른 감투에 연연하지 않았다.
성철 스님이 열반에 들자 종정의 자리에 앉게 된 서암 스님은 종단을 바로 세우는 데 진력을 다했다. 그는 한국 불교의 발전을 위한 일이라면 떠밀려 앉게 된 자리라도 최선을 다했으며 진정한 부처가 되는 길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스스로 본이 되었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면 자신의 이름을 아끼면 뭐하겠냐는 서암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이 평생 절 밥을 먹은 자의 도리라고 했다. 이렇게 자리에 연연하기보다 일에 욕심이 많았던 서암이 탈종단을 선언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종단을 떠난 이유도 ‘자유’이다. 종단과 문중을 두고 세력을 두고 끊임없이 다투던 한국 불교를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자유로운 불자의 길을 그는 택했다. 종단이라는, 문중이라는 틀 안에서 살고 싶지 않았던 서암은 다시 자유라는 길을 향해 나이 든 자신의 발을 내딛은 것이다. 스님의 탈종단 선언은 자유를 향해 종단이라는 벽을 넘고 경계를 무너뜨린 최초의 거사라고 작가 이청은 밝히고 있다.
그가 외치는 ‘자유’의 시작은 언제부터일까? 바로 그가 죽음을 마주했을 때부터이다. 동경 유학 당시 얻은 폐병은 그를 죽음과 마주하게 했다. 곧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그는 어떻게 죽은 것인가에 대한 문제만을 고민했다. 죽음이 눈앞에 와 있고 그것을 피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니 홀가분해졌고 바로 그 순간이 태어난 후 처음으로 맛 보았던 자유라고 그는 고백한다. 그 고백을 할 당시도 그는 자유로웠으리라.
그에게 왜 자유가 필요했을까? 이 늙은 남자에게 왜 자유가 필요한가? 조실스님과 종정을 거치면서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없었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없고, 보통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할 기회도 많지 않았다는 그의 고백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다. 그렇지 못했던 그때의 상황을 회상하며 자유를 택한 그는 일반 스님이 아닌 일반 사람들에게 불법을 전하며 ‘자유’를 누렸다. 아주 빡빡하게 잡힌 스케줄 속에서 서암은 아주 즐거워 보였다고 이청은 말한다. 이런 즐거움을 위해 그에게 자유는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타고난 자유인이었다.
마음이 곧 부처다-불교의 가르침이란 꿈에서 깨게 하는 것
서암은 불교의 체(體)와 용(用)은 다르지 않고 하나라는 일원론을 말하면궼 색즉시공(色卽是空)이 바로 진리라고 말한다. 마음과 그 마음을 통해 부처를 기다리는 마음이 별개가 아니라는 것이며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維心造), 즉 모든 것이 마음에서 일어난다고 했다.
여여부동(如如不動)하여 시간과 공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항상 존재하는 자기 인생의 근본을 바로 보아야 한다. 시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것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항상 스스로 앉고 스스로 일어나는 자기의 부처를 가지고 있다고 서암은 가르친다. 청정무구하고 언제나 한가하며 고요한, 부동의 자기의 존재는 우리의 귀, 입, 코를 보지 못하는 눈과 같다. 한 몸에 있으면서도 그 존재를 보지 못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보지 못한다고 하여 귀, 입, 코가 없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와 같다. 우리의 마음이 부처자리인데 그것을 보지 못한다고 하여 그 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온갖 생각에 마음의 정체를 알기가 쉽지 않고, 알았다고 한들 그 본래의 마음자리를 바로 보기가 용이하지 않다. 자신의 본마음을 등지고 살기 일쑤인 요새, 불교는 마음의 정체를 밝히며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자리를 깨닫게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우리가 어머니의 태 안에서 존재하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는가. 이러한 물음에 서암은 인간의 근본은 불생불명이며 무시무종이라고 말한다. 우주의 만물은 소멸되는 것이 없고,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없는 불교의 가르침에 주목해야 한다. 참선을 통해 눈이 밝아지면 비로소 어머니의 태 안에 있을 때, 또 그 이전의 내가 어디 있었는지도 훤히 알 수 있다. 불자의 수행은 무명으로 일어나는 연기의 법속에서 상실된 진정한 자기 본성을 되찾는 과정이라고 서암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