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가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가를 높이고 다른 학문을 내쫓은 뒤부터 유가는 지배 세력의 지원 아래 정통 학문으로서의 권위를 얻었다. 특히 무제는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같은 유가 경전마다 전문가를 뽑아서 박사(博士) 칭호를 주었다. ‘오경박사’라고 부르는 이 제도는 삼국시대 우리나라에도 들어왔고, 오늘날 박사라는 호칭도 여기에서 왔다. 박사는 학교를 만들고 학생들을 모아서 자신이 전문적으로 알고 있는 유가 경전을 가르칠 수 있었다. 더구나 한나라는 동중서의 건의에 따라 유학 사상을 익힌 사람을 추천받아 관리로 임명했다. 이로부터 이천 년을 이어져 내려오는 유학과 정치의 연결 고리가 완성되었다. -17~18쪽
강의가 시작되어 좌중이 조용히 인종대사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절 당간지주에 달린 깃발이 바람이 불자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승려 한 명이 말했다. “바람이 불어서 깃발이 펄럭이네” 그러자 다른 승려가 그 말을 받아서 말했다. “아닐세. 바람이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저것은 깃발이 스스로 펄럭이는 것이라네” 두 사람은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곁에서 듣던 다른 사람들이 가세하면서 ‘바람이 깃발을 흔드는 것이다’, ‘아니다 깃발 제 스스로 펄럭이는 것이다’를 두고 소란이 벌어졌다. 한참 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혜능이 답답하다는 듯이 앞으로 나섰다. “바람이 깃발을 흔드는 것도 아니고, 깃발 제 스스로 펄럭이는 것도 아니며, 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깃발을 흔드는 것일세”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놀라 한순간 조용해졌다. -82~83쪽
주희는 성리학의 집대성자이다. 하지만 그가 북송 성리학만 종합한 것은 아니었다. 성리학을 중심에 놓고 그 위에 한나라와 당나라의 경전 해석을 합침으로써 전체 내용을 풍부하게 했고, 여기에 노장사상과 불교의 논리를 들여와 유가사상의 논리 체계를 완성했으며, 문학과 사학 그리고 자연과학의 성과까지를 합쳐 들였다. 이렇듯 주희는 그 이전까지의 모든 학술과 사상을 자기 사상의 체계 속에서 집대성했다. 따라서 그는 중국 사상의 흐름에서 본다면 그 이전이 모두 그에게로 모이고 그 이후가 모두 그로부터 시작되는 핵심 고리다. -158쪽
황종희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명이대방록》의 집필을 시작한 것은 53세 때였고, 이듬해 완성하여 출판한다. 《명이대방록》은 명나라가 청나라에 무너지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면서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꼼꼼히 따져보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사회를 세우려는 열망을 담은 책으로, 경세치용을 중시하는 명말 청초의 사상적 흐름을 잘 반영한다. 황종희는 명나라 멸망의 원인을 전제군주제의 폐해에서 찾았고, 그 대안으로 백성이 주인 되는 사회를 제시했다. 이 같은 근대적 의식 때문에 이 책은 건륭제 시절 금서가 되기도 했다. -238~239쪽